사명대사 생가지 - 주변 여행 및 근처 관광 명소 - 국내 여행 정보

한국관광공사에서 제공하는 공공데이터를 활용하여 사명대사 생가지 - 주변 여행 및 근처 관광 명소 정보를 소개합니다.

사명대사 생가지

17.2 Km    20974     2024-05-20

경상남도 밀양시 무안면 사명대사생가로 642

* 의승장 사명대사를 만날 수 있는 곳, 사명대사 생가지 * 조선 후기의 승려 유정(사명대사)이 태어난 곳이다. 사명대사가 1544년(중종 30)에 진사 임수성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13세 때 가출하여 직지사 신묵에게 가서 승려가 될 때까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다. 사당인 숙청사와 사명대사가 태어나서 자란 곳인 육영당, 사명대사가 거처하던 사랑채인 사명당 등이 남아있다. 1992년에 경상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사명대사는 어린 시절을 여기서 보냈으며, 많은 일화가 전해오고 있다. 사명대사가 가끔 고향으로 방문할 때 쉬었다는 바위가 아직 그대로 남아 있어, 그의 발자취를 엿볼 수 있고, 마을 뒷산 서쪽 기슭에는 사명대사의 조모와 부모의 묘소가 있다. * 임진왜란 당시 의승병의 핵심, 사명대사 * 사명대사는 13세의 나이에 유촌 황여헌 선생에게 글을 배우다가 [세속 학문은 천하고 비루하여 시끄러운 세상 인연에 얽매여 있으니 어찌 번뇌 없는 학문을 배우는 것과 같을 것인가?] 하고, 그 해 가을 황악산 직지사로 가서 신묵화상에게 머리를 깍고 선문에 들어가게 되었다. 금강산에 들어가 수도하던 중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승병을 모아 의병장으로서 활약하였으며, 1593년 명나라 구원군이 주축이 되었던 평양성 탈환전투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다. 선조는 그의 공을 크게 인정하여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의 벼슬을 내렸으며, 일본과 강화를 위한 사신으로 임명하기도 했다. 그 뒤, 병을 얻어 해인사에서 요양하다가, 광해군 2년(1610) 설법을 마치고 세상을 떴다. 저서로 『사명당대사집』,7권과 『분충서난록』,1권 등이 있다.

함안향교

함안향교

17.2 Km    18981     2024-06-14

경상남도 함안군 함안면 덕암길 103

함안군 함안면 봉성리에 위치한 함안항교는 훌륭한 유학자를 제사하고 지방민의 유학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나라에서 지은 교육기관이다. 조선 효종(1649~1659) 때 세워졌으며, 6.25전쟁 때 불탔으나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건물은 출입문인 풍화루, 공부하는 곳인 명륜당과 동·서재, 사당인 대성전과 동·서무가 일렬로 지어졌으며, 명륜당이 앞에 있고 대성전이 뒤에 있는 전형적인 전학후묘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특이한 것은 대성전 좌우에 동·서무가 나란히 서 있는데, 이것은 급경사지라는 지형의 제약 때문으로 보인다. 조선 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받아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1894) 이후 제사만 지내고 있다. 대성전에는 공자를 주벽으로 한 중국 성현 7위를 봉안하였고, 동무에는 설총을 비롯한 9위, 서무에는 최치원을 비롯한 9위 등 국내 성현 18위를 봉안하고 춘추로 제를 지내고 있으며, 1983년 8월 12일 유형문화재 제211호로 지정되었다. 함안향교에 오래된 은행나무들이 많이 심어져 있어 가을철에는 은행나무를 보기 위해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곳이다.

임진왜란의 영웅, 사명대사를 만나다

17.2 Km    1690     2023-08-11

밀양은 임진왜란 때 승병장으로 활약했던 사명대사가 태어난 고장이다. 밀양의 동서 축을 이으며 사명대사 생가지, 표충비, 표충사 등 사명대사의 유적이 이어진다. 사명대사가 태어난 생가가 남아 있는 생가지와 나라에 변고가 있을 때마다 땀을 흘리는 표충비, 사명당의 위패가 모셔진 표충사 등 승병장으로 국난 극복에 앞장선 사명당의 일대기를 따라가볼 수 있는 여정이다.

첨두서원

17.3 Km    1768     2023-03-24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 내서읍 삼계로 63

첨두서원(瞻斗書院)은 삼계리에 위치하고 있다. 이 서원은 원래 노경종(盧景宗)을 추모하여 교하 노씨 후손들이 건립한 재실인데, 1981년에 향교 유림에 의해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창녕 술정리 동 삼층석탑

17.3 Km    2290     2023-12-19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시장2길 37

창녕 술정리 동 삼층석탑은 8세기 중엽인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탑으로, 위로 올라가면서 적당한 비율로 줄어드는 몸돌로 인해 충분한 안정감과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2단의 기단에 3층의 탑신을 올린 형태로, 통일신라 석탑의 일반적 모습을 갖추고 있다. 창녕군은 삼국시대부터 신라의 영역에 속해 있던 지역으로 진흥왕 때부터 신라의 정치·군사상의 요지가 되었다. 이 탑을 동탑이라 하는 것은 한 사찰 내에 쌍탑이 건립되어서가 아니라 행정구역상 술정리 내에 2기의 석탑이 존재하기 때문으로, 서 삼층석탑은 약 1km 떨어진 곳에 있다. 동 삼층석탑은 민가의 담 밑으로 하층 기단의 일부가 들어가 있었으나, 1965년 주위에 있던 민가를 철거하고 탑을 해체해 복원했다. 기단에는 위·아래층 모두 각면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이 새겨져 있고, 탑신 역시 몸돌의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을 한 조각이 있다. 지붕돌은 수평을 이루던 처마가 네 귀퉁이에서 살짝 치켜 올라가 간결한 모습이며, 밑면에는 5단의 받침을 두었다. 복원 당시 3층 몸돌에서 뚜껑 달린 청동잔형사리용기 등의 유물들이 발견되었고, 바닥돌 주위에 돌림돌을 놓았던 구조도 밝혀졌다. 세부적인 수법도 정교하여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국보)과 비길만한 기품이 있으며, 삼국시대부터 신라 영역에 속해 있던 창녕의 지역적인 특성으로 볼 때, 경주 중심의 탑 건립 경향이 지방으로 확산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어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창녕 술정리 서 삼층석탑

17.3 Km    21411     2024-06-19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창녕 술정리 서 삼층석탑은 신라식 일반형 석탑으로 2단의 기단 위로 3층의 탑신을 올린 형태이다. 높이 5.1m, 화강석으로 된 탑으로 1970년 6월 24일 보물로 지정됐다. 아래·위층 기단을 8개의 돌로 구성한 특이한 수법을 보인다. 아래층 기단은 바닥돌과 한돌로 붙여서 만든 8개의 돌을 짜 맞추었는데 각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본떠 새겼으며, 그 사이로 가운데 기둥을 2개씩 새겨 놓았다. 위층 기단도 8개의 돌로 구성되었고 면마다 중간에 작은 널돌을 한 장씩 끼웠으며, 모서리 기둥을 두지 않고 4면에 2개씩의 안상을 조각하였다. 현재 남쪽 면의 중간에 끼워져 있는 돌에는 거친 문짝모양이 새겨져 있는데 후대에 작업한 것으로 짐작된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구성되어 있으며, 몸돌에는 네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겼다. 지붕돌은 낙수면이 얇고 평평하며 밑면의 받침은 5단씩이고, 네 귀퉁이가 뚜렷하게 치켜올려져 있어 경쾌하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인 노반과 엎어놓은 그릇 모양의 장식인 복발만이 남아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이나 전체적인 조각수법으로 볼 때, 창녕 술정리 동 삼층석탑보다 다소 떨어지며 조성시기도 뒤처지는 것으로 보인다.

창녕상설시장

창녕상설시장

17.3 Km    0     2023-10-19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창녕시장길 66

창녕읍의 상설시장이자 5일장이 서는 곳으로 평상시에는 주차장으로 사용되지만 3일, 8일이 되면 어김없이 전통 시장으로 변신한다. 고추, 마늘, 양파 등 각종 채소류와 제철 과일 그리고 꼬막, 조개, 새우 등의 신선한 해산물, 잉어, 가물치, 미꾸라지 등 민물고기를 판매하는 어물전도 즐비하다. 건조식품, 가전용품, 약재, 떡 등 판매하는 품목도 다양하고 직접 꾸민 가판도 가지각색이지만 전통시장답게 인심은 여전히 정겹다. 장날 빠지면 섭섭한 먹거리도 다양하지만 그중 1박 2일 촬영 중 이수근이 먹었다는 수구레 국밥은 여전히 인기가 많아 꼭 한번 먹어봐야 할 메뉴이다.

창녕포교당

창녕포교당

17.4 Km    20107     2023-05-23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신당2길 4-3

* 석가모니의 진신사리가 모셔진 곳, 창녕포교당 *

화왕산의 억새와 관룡사로 유명한 경남 창녕은 예부터 비화가야(非火伽倻), 즉 비사벌이라 불려지던 문화의 고장으로 각종 문화재가 많아 제2의 경주라 불린다. 일찍이 삼국시대 이전부터 낙동강 이동(以東)에 아름다운 가야문화를 창조해온 창녕은 부처님의 법화도 함께 이어져 내려온 유서 깊은 고장이다. 비교적 짧은 역사를 가진 전통사찰인 통도사 창녕포교당은 불법을 수호하고 포교의 일선에서 매진하고 있는 창녕의 명찰 중 하나이다.

비록 포교당이라는 이름을 가진 작은 절집이라고 생각하기 쉽겠지만 창녕포교당은 적멸보궁을 조성하고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모셨으며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조선시대 목조석가여래가 안치되어 있는 사찰이다. 또한 창녕포교당이 자리한 곳은 신라시대 거찰로 알려졌던 인왕사(仁旺寺)가 있었던 곳이라고 하니 창녕포교당은 포교당 이상의 조건과 역할을 보유하고 있다고 하겠다. 실제로 창녕포교당은 기도처와 포교의 방편 외에도 관내 독거노인돕기 활동을 매일 펼쳐나가는 등 지역사회 내에서도 기여하는 사찰로정평이 나있다. 비화가야의 넓은 들판 속 인왕사터에 자리한 창녕포교당은 불국정토를 만들기 위한 염원이 불보살의 뜻과 닿아있으리라 믿어본다.

* 창녕포교당의 창건배경 및 역사 *

통도사 창녕포교당의 창건에 대한 기록은 요사채 문설주 위에 죽 걸려있는 현판 가운데 '불찰통도사본말사창녕포교당창건대시주공덕기'에 나와 있다. 이를 살펴보면 불기 2966년(1939) 7월 7일에 포교사 춘담(春潭)스님께서 인왕경(仁旺經)을 교화하기 위하여 당시 창녕지역의 대지주였던 하준석(河駿錫, 당시 곤양, 현풍, 비안군수를 지냈던 통정대부 하재구의 2남이자 진양 하씨 30세손)의 슬하에 자녀가 귀하여 득남원(得男願)을 발원하여 세운 절이라고 나와 있다. 당시 창녕포교당에 처음 주석했던 춘담tm님은 사찰을 준공한 후의 심정을 노래한 송(頌)에서 창건 불사가 얼마나 어려웠음인지 이렇게 적고 있다.

建立何歲月:어느 세월에 다 지으랴!
龜毛爲棟樑:거북의 털로써 기둥을 세우랴!
經營空劫前:세월이 다 가기 전에 운영이나 해볼까
兎角作柱椽:토끼 뿔로 기둥 서까래를 삼을까나

또 ‘창녕지명사’에 전하는 창녕읍 신당마을 유래에 대해 '창녕여고와 포교당(仁旺寺)이 있는 일대로 말흘리의 동북부에 위치한다'라고 적고 있으며 창녕군의 전통사찰현황에 창녕포교당은 1920년도 창건하였는데 “신라시대 창녕읍 술정리에 ‘인왕사’라는 포교당 전신인 대사찰이 있었으나 임진왜란으로 전소되자 동산선사가 옛 인왕산사를 재현한 포교당을 지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 절에 초창시부터 지극정성으로 다니고 있는 법왕자(法王子, 85세, 신당리 거주)보살의 증언에 의하면 곤양군수를 지낸 만석군의 모친인 김선명화(金善明華)보살과 아들 내외인 하준석(河駿錫), 서공덕화(徐功德華)보살이이 아들을 낳기 위해 원불로 지어졌다는 것이다.

또한 그의 아들 영달(永達)이 범종을 시주하였다는데 지금도적멸보궁에 ‘하영달’이라는 명문이 있는 당시의 범종이 남아 있다. 따라서 창녕포교당은 1939년 창건이 확실해 보인다. 이후 1978년 청운스님(현 밀양 표충사 주지)이 주석할 당시 6.25때 화마를 입은 관룡사 팔상전에 모셨던 목조석가여래좌상을 이운해 왔는데 현재 도유형문화재로 지정돼 이후 적멸보궁에 봉안해 놓았다. 이후 설법전 등의 요사채와 석가모니입상 등을 조성해 놓았다.

창녕 진양하씨 고택

창녕 진양하씨 고택

17.4 Km    21506     2023-12-15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시장1길 63

조선시대의 가옥으로 하병수의 17대 조상인 백연이 건립하였다고 전하며, 상도리에 건륭 25년이라 적힌 묵서가 있어 1760년(영조 36)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의 가옥구조와 민가의 건축술을 알 수 있는 남향의 초가로 하씨가 여러 대에 걸쳐 살아온 터전이다. 가옥은 목조 초가로 일자형 홑집이며, 오른쪽 첫 칸이 부엌이고, 안방, 대청, 건넌방이 차례로 각각 1칸 씩인 4칸 집으로 약간씩 변형되었다. 부엌 뒤로 반문을 내달아 창고를 만들었고, 남방집의 고상형 대신 산곡간의 저상식 집처럼 전퇴를 생략하였다. 마루판자는 윗면이 평면, 아래면은 원목 그대로이고 지붕은 쇠풀로써 덮었으며 못은 사용하지 않았다. 서까래는 구멍을 뚫어 그대로 이었다. 현대의 가옥에서 부엌 위치가 대부분 서쪽에 있는 것에 반해 이곳은 동편에 있다. 서쪽으로 부터 건너방, 대청, 안방, 부엌 순으로 되어 있고 부엌 뒤로 반문을 내달아 창고를 만들었고 지붕은 양토 없이 밀대를 이용해 거꾸로 엮어 얹었다. 개인 주택이기 때문에 관람 시 입장시간을 준수해야 한다.

도계서원 유허비

17.4 Km    1490     2023-11-22

경상남도 함안군 함안면 파수북길 35-36

도계서원은 이숙(1550~1615), 이휴복(1568∼1624), 박진영(1569∼1641), 조익도(1585~1624) 선생 등 4명의 공신의 행적을 기리기 위하여 1780년(정조 4)에 창건되었다. 그 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는데 지금까지 복원되지 못하고 유허비만 남아 있다. 도계 서원은 함안군의 서쪽 10리(3.93㎞) 지점인, 파수리 원촌 마을에 위치하였다. 원촌 마을을 서원 마을이라고도 하는데 서원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원촌 마을은 현재도 서원 마을이라고도 불리며 우물터의 흔적, 와편 등 흔적이 곳곳에 흩어져 있어 서원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