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하리(더하리스토리 주식회사) - 주변 여행 및 근처 관광 명소 - 국내 여행 정보

한국관광공사에서 제공하는 공공데이터를 활용하여 더 하리(더하리스토리 주식회사) - 주변 여행 및 근처 관광 명소 정보를 소개합니다.

더 하리(더하리스토리 주식회사)

더 하리(더하리스토리 주식회사)

4.4 Km    0     2024-06-21

경상남도 창녕군 화왕산로 170

더 하리는 경남 창녕군 화왕산의 맑고 푸르른 정기가 녹아있는 작고 소박한 하리마을에서 탄생했다. 더 하리의 심볼인 따오기는 멸종되었다가 창녕군이 복원하여 천혜의 환경이 유지되는 창녕에서만 서식하는 세계에서 귀한 새이다. 더 하리의 제품은 따오기가 살아갈 자연을 사랑하고 지키는 것을 목적으로 만들어 진다. 모든 제품에 자연의 진심을 담아, 엄선된 최상급 재료를 사용하여 ‘더하리’만의 수제방식으로 만들어 진다. 온라인쇼핑몰 스마트스토어, 아이디어스에서 제품을 구매할 수 있다.

창녕박물관

4.5 Km    35752     2024-06-11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창밀로 34

창녕박물관은 1996년 창녕지역 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전시할 목적으로 창녕유물전시관으로 처음 개관했다. 이후 1997년 1종 전문박물관인 창녕박물관으로 등록, 승격되었으며, 2018년 박물관 리모델링 사업을 통해 어린이박물관을 포함한 교육관을 신축한 후 지금의 모습으로 재개관하였다.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의 바로 옆에 위치하며 비화가야시대 유적인 무덤과 그 내부에 부장되었던 유물들을 한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다. 유물전시관일 때에는 복제품만을 전시했지만, 2011년 국가귀속문화재 보관·관리기관으로 선정된 뒤부터는 지역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인수하여 직접 전시하고 있다. 2개의 전시실과 시청각실 등을 갖추고 있으며, 건물은 지상 1층, 지하 1층 규모이며, 1층은 제1전시실과 제2전시실로 되어 있다. 지하에는 시청각실이 마련되어 있어 창녕군 관내의 문화유적을 한눈에 알 수 있는 시청각 자료를 방영하고 있다. 가야와 신라시대의 유물 총 166종 276점 (토기류 85점, 마구류 42점, 장신구류 50점, 무구류 53점, 기타 46점)이 전시되어 있다. 전시관 중앙홀에는 가야고분의 축조 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모형관이 설치되어 있어, 가야시대 고분문화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다.

경주 못지 않은 문화재의 보고

경주 못지 않은 문화재의 보고

4.5 Km    352     2023-08-09

가야시대 및 신라시대의 유물 총 166종 276점 (토기류 85점, 마구류 42점, 장신구류 50점, 무구류 53점, 기타 46점)이 전시되어 있으며 교동고분군과 계성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창녕포교당

창녕포교당

4.6 Km    20107     2023-05-23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신당2길 4-3

* 석가모니의 진신사리가 모셔진 곳, 창녕포교당 *

화왕산의 억새와 관룡사로 유명한 경남 창녕은 예부터 비화가야(非火伽倻), 즉 비사벌이라 불려지던 문화의 고장으로 각종 문화재가 많아 제2의 경주라 불린다. 일찍이 삼국시대 이전부터 낙동강 이동(以東)에 아름다운 가야문화를 창조해온 창녕은 부처님의 법화도 함께 이어져 내려온 유서 깊은 고장이다. 비교적 짧은 역사를 가진 전통사찰인 통도사 창녕포교당은 불법을 수호하고 포교의 일선에서 매진하고 있는 창녕의 명찰 중 하나이다.

비록 포교당이라는 이름을 가진 작은 절집이라고 생각하기 쉽겠지만 창녕포교당은 적멸보궁을 조성하고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모셨으며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조선시대 목조석가여래가 안치되어 있는 사찰이다. 또한 창녕포교당이 자리한 곳은 신라시대 거찰로 알려졌던 인왕사(仁旺寺)가 있었던 곳이라고 하니 창녕포교당은 포교당 이상의 조건과 역할을 보유하고 있다고 하겠다. 실제로 창녕포교당은 기도처와 포교의 방편 외에도 관내 독거노인돕기 활동을 매일 펼쳐나가는 등 지역사회 내에서도 기여하는 사찰로정평이 나있다. 비화가야의 넓은 들판 속 인왕사터에 자리한 창녕포교당은 불국정토를 만들기 위한 염원이 불보살의 뜻과 닿아있으리라 믿어본다.

* 창녕포교당의 창건배경 및 역사 *

통도사 창녕포교당의 창건에 대한 기록은 요사채 문설주 위에 죽 걸려있는 현판 가운데 '불찰통도사본말사창녕포교당창건대시주공덕기'에 나와 있다. 이를 살펴보면 불기 2966년(1939) 7월 7일에 포교사 춘담(春潭)스님께서 인왕경(仁旺經)을 교화하기 위하여 당시 창녕지역의 대지주였던 하준석(河駿錫, 당시 곤양, 현풍, 비안군수를 지냈던 통정대부 하재구의 2남이자 진양 하씨 30세손)의 슬하에 자녀가 귀하여 득남원(得男願)을 발원하여 세운 절이라고 나와 있다. 당시 창녕포교당에 처음 주석했던 춘담tm님은 사찰을 준공한 후의 심정을 노래한 송(頌)에서 창건 불사가 얼마나 어려웠음인지 이렇게 적고 있다.

建立何歲月:어느 세월에 다 지으랴!
龜毛爲棟樑:거북의 털로써 기둥을 세우랴!
經營空劫前:세월이 다 가기 전에 운영이나 해볼까
兎角作柱椽:토끼 뿔로 기둥 서까래를 삼을까나

또 ‘창녕지명사’에 전하는 창녕읍 신당마을 유래에 대해 '창녕여고와 포교당(仁旺寺)이 있는 일대로 말흘리의 동북부에 위치한다'라고 적고 있으며 창녕군의 전통사찰현황에 창녕포교당은 1920년도 창건하였는데 “신라시대 창녕읍 술정리에 ‘인왕사’라는 포교당 전신인 대사찰이 있었으나 임진왜란으로 전소되자 동산선사가 옛 인왕산사를 재현한 포교당을 지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 절에 초창시부터 지극정성으로 다니고 있는 법왕자(法王子, 85세, 신당리 거주)보살의 증언에 의하면 곤양군수를 지낸 만석군의 모친인 김선명화(金善明華)보살과 아들 내외인 하준석(河駿錫), 서공덕화(徐功德華)보살이이 아들을 낳기 위해 원불로 지어졌다는 것이다.

또한 그의 아들 영달(永達)이 범종을 시주하였다는데 지금도적멸보궁에 ‘하영달’이라는 명문이 있는 당시의 범종이 남아 있다. 따라서 창녕포교당은 1939년 창건이 확실해 보인다. 이후 1978년 청운스님(현 밀양 표충사 주지)이 주석할 당시 6.25때 화마를 입은 관룡사 팔상전에 모셨던 목조석가여래좌상을 이운해 왔는데 현재 도유형문화재로 지정돼 이후 적멸보궁에 봉안해 놓았다. 이후 설법전 등의 요사채와 석가모니입상 등을 조성해 놓았다.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

4.6 Km    19799     2024-06-16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신라 진흥왕 때 세워진 것으로 원래 화왕산 기슭에 있던 것이 소풍 나온 학생에게 발견되어 알려졌으며 1924년 지금의 만옥정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흔히 순수비로 통칭하나 북한산, 황초령, 마운령에 있는 순수비처럼 순수관경이란 말이 없고 왕이 새 점령지를 다스리는 내용과 이에 관련된 사람들이 열거되어 있어 척경비라 한다.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는 개석이나 대석을 사용하지 않고 자연 암석을 이용했으며 삼국시대 비문의 일반적인 형식을 갖추고 있다. 한 면을 간 다음 바깥면 비석의 형상에 따라 음각의 줄을 돌렸는데, 오른쪽 상부는 암석이 경사면을 이루고 있는 관계로 1행씩 낮추어 계단식으로 글을 적었다. 비문은 27행으로 한 행의 자수는 일정하지 않아 끝 행은 3자뿐인 것도 있으나, 26자의 행이 가장 많고, 후반부는 위에서 2행마다 1자식 낮추어 적혀 있다. 비문 전반부는 마모되어 자획이 불분명한 점이 있으나, 후반부는 선명하여 판독이 가능하다. 비문의 내용은 순수의 연월(신사년 2월), 사적, 수행원의 3부분으로 되어있고, 인물의 기록 순서는 속부, 인명, 직관, 직위를 표기하여 삼국시대 신라비문의 일반적인 형식을 따르고 있다. 서체는 해서체이며 글자 간격은 4㎝이다.

서당골오토캠핑장

서당골오토캠핑장

4.6 Km    0     2023-11-07

경상남도 밀양시 무안면 삼화길 680-23

서당골캠핑장은 밀양시 무안면 화봉리 서당골 고즈넉한 산골짜기에 자리하고 있어, 캠핑장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아름다운 곳이다. 캠핑장 곳곳에 나무가 많이 식재되어 있는 숲 속 캠핑장으로 자연 그늘이 많은 편이다. 캠핑장은 계단식으로 파쇄석 사이트로 되어 있으며, 소음이 있어도 어느 정도 커버되는 거리에 있어 조용히 보낼 수 있다. 텐트를 2~3개 같이 설치할 수 있는, 큰 크기의 사이트가 있어 친구들이나 단체로 와서 캠핑을 즐겨도 좋은 곳이다. 특히 여름에 방문해 정자에 앉아 있으면 산과 계곡을 따라 들어오는 골바람이 아주 시원하다. 가을에는 밤 따기 체험을 할 수 있다. 어린이들을 위한 놀이공간인 트램펄린이 있어 마음껏 뛰어놀기에 좋으며, 화장실과, 샤워장, 개수대 온수사용 등 편의시설이 잘 되어있다.

1,500년 전 가야시대 소녀를 만나러 가다

1,500년 전 가야시대 소녀를 만나러 가다

4.7 Km    3132     2023-08-09

창녕은 가야와 신라의 유적이 남아 있는 문화유산의 고장이다. 가야시대의 고분군으로 알려진 교동, 송현동고분군에서는 인골이 수습되어 가야시대의 순장된 소녀의 모습을 복원하기도 했고, 국보로 지정된 신라 진흥왕이 세운 척경비와 술정리 동삼층석탑, 조선시대의 석빙고까지 시대를 아우르는 문화유산을 만난다.

창녕 만옥정공원

창녕 만옥정공원

4.7 Km    25179     2024-04-23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교상리 28-34

만옥정공원은 창녕공원이라고도 불리는 공원으로, 면적 1만㎡의 작은 공원이지만 지정문화재와 봄철 벚꽃이 장관을 이루는 곳으로 유명하다. 약 250년 전에 만옥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 당시에는 봄마다 명창 대회와 그네뛰기 대회가 열렸다고 전해진다. 화왕산으로 가는 등산로가 옆으로 나 있다. 공원 뒤쪽 언덕 위에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비석인 국보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가 있는데, 561년(진흥왕 22)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하며 원래 창녕읍 화왕산록에 있던 것을 1924년에 이곳으로 옮겨왔다. 공원에는 조선 후기의 관아 건물인 창녕객사(경상남도 유형문화재), 통일신라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퇴천삼층석탑(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창녕 척화비(경상남도 유형문화재) 등의 다양한 문화재가 있다.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

4.7 Km    23058     2024-06-16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창밀로 34

창녕지역은 <삼국사기>에 나오는 진한의 12개 나라 중 하나인 불사국으로 비사벌국이라고 불리던 곳으로,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은 화왕산 서쪽 기슭의 목마산성 아래 창녕읍 교리와 송현리 일대에 분포하고 있는 대형 고분군을 말한다. 1911년 일본인 학자 세키노 타다시에 의해 처음 알려졌다. 교동에는 왕릉이라고 불리는 대고분을 중심으로 주위에 대소 수십 기의 고분들이 모여 있었으나, 현재는 8기만이 남아 있고 남은 봉토도 보존 상태가 완벽하지 않다. 1918년~1919년에 일본인에 의해 일부를 발굴조사했고, 고분에서 마차 20대와 화차 2량분의 토기와 금공예품들이 다량으로 출토되었다고 전해지나 현재 국립중앙박물관과 일본 도쿄국립박물관이 소장한 일부 유물을 제외하고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당시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대형 고분군은 횡구식 또는 횡혈식 고분이었다고 한다. 2002년부터 경남문화재연구원과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에 의해 실시된 송현동고분군 6, 7호분의 발굴조사에는 국내 최초로 배 모양의 녹나무관과 함께 280여점의 토기를 비롯한 장신구·마구·무구·농공구 등 90여점 이상의 철기와 100여점이 넘는 목기가 출토되어 학계의 큰 주목을 받은 바 있다. 지금까지 확인된 자료를 통해 보면 금동관, 금·은장신구, 은관장식, 금동관모, 금귀걸이 등의 장신구와 각종 마구류, 장식무기류, 비늘갑옷을 비롯한 각종 철제무기류, U자형 삽날을 비롯한 각종 농공구류와 금속 용기류, 각종 토기류와 목기류가 교동·송현동 고분군에서 출토되었다. 일부 토기류를 비롯한 대부분의 유물은 신라의 수도 경주에서 출토되는 유물과 거의 흡사하며, 고분의 구조로 볼 때 5~6세기 전반에 조성된 고분군으로 추정되고 있다.

청련사(창녕)

4.8 Km    18135     2024-04-30

경상남도 창녕군 계성면 계성화왕산로 288-102

영취산의 북녘 기슭에 자리한 청련사는 영취산에 있던 대흥사(大興寺)의 작은 암자로 세워졌으며, 대흥사의 동쪽에 있다 하여 동암(東庵)이라 불려왔다. 대흥사는 청련사뿐만 아니라 인근의 극락암(極樂庵)ㆍ삼성암(三聖庵)의 기록에서도 드러나듯이 이 일대의 많은 암자들을 거느릴 만큼 사격이 높았던 듯하다. 따라서 청련사의 중창주 덕암(德庵) 스님 또한 사라져버린 대흥사를 아쉬워하며 퇴락한 암자를 새롭게 일으켜 세울 목적으로 법당을 창건했을 것이다. 현재 청련사에 남아 있는 현판 자료에는 하나같이 청련암 앞에 ‘영산 대흥사’를 붙이고 있어, 대흥사는 이미 폐허가 되었지만 청련암이 그 법등을 잇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사중에 전하는 1842년(헌종 8)의 중창기(重創記)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어, 청련사가 자리한 자연적 입지를 짐작게 한다. 좌우에 둘러 있는 봉우리들이 높이 솟아 있어 마치 많은 별들이 북두성을 향하는 것과 같고, 앞뒤로 흐르는 골짜기 시내가 잔잔하여 수많은 옥가루가 허공에서 부서져 내린 듯하다. 이는 반드시 하늘이 아까워 숨겨놓은 곳이며 땅이 내보이기 인색하게 숨겨놓은 명승지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곳은 가람을 세워 법당을 창건하기에 적합한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