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비원 석불 - 주변 여행 및 근처 관광 명소 - 국내 여행 정보

한국관광공사에서 제공하는 공공데이터를 활용하여 제비원 석불 - 주변 여행 및 근처 관광 명소 정보를 소개합니다.

제비원 석불

제비원 석불

.0M    2     2024-02-02

경상북도 안동시 제비원로 672

안동시 이천동 태화산에 있는 불상인 제비원 석불은 고려시대 불상으로 정식명칭은 [안동 이천동 마애여래입상]이다. 옛 연미사 절터에 있는 석불상으로 연미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의 말사로 신라 634년(선덕여왕 3) 명덕이 세운 사찰로 오랫동안 폐사로 남아 있었으나, 1918년 복원하였다. 자연 암벽에 불신을 새기고 그 위에 머리는 따로 제작하여 올려놓은 거구의 불상이다. 자연석에 머리 높이 2.43m, 전체높이 12.38m의 석불을 조각하였다. 몸체의 선각과 얼굴의 뚜렷한 인상이 매우 대조적이다. 머리의 육계가 큼직하고 윤곽이 뚜렷하여 매우 개성이 있는 모습이다. 몸체를 이루는 자연 암석도 위압적이지만, 입을 꾹 다물고 눈에 힘을 잔뜩 준 모습이 매우 권위적이며 힘이 있어 보인다. 눈, 코, 입의 선이 각지고 매우 뚜렷하여 이목구비가 분명한 인상이다. 자연 암석으로 이어진 목에는 삼도가 희미하게나마 새겨져 있다. 얼굴의 강한 윤곽이나 세부적 조각 양식으로 보아 11세기 무렵에 제작된 불상으로 추정되며 국가 보물로 지정되었다.

연미사(안동)

연미사(안동)

40.0M    20153     2024-05-17

경상북도 안동시 제비원로 672

연미사는 경북 안동시 이천동 오도산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본사 고운사의 말사로 고구려 승려 보덕(普德)의 제자 중 한 명인 명덕이 바위에 불상을 새겨 모시고 연구사라고 한 것이 시초이다. 그 뒤 불상을 덮은 지붕이 제비와 비슷하여 연자루라 하였고, 승려가 거주하는 요사가 제비꼬리에 해당하고 법당이 제비부리에 해당한다고 해서 연미사라 불렀다. 연미사라는 이름은 원래 조선시대 영남지역에서 한양으로 오가는 길 여행객이 쉬어가는 숙소인 연비원, 속칭 제비원이라 불렀다는 데서 비롯됐다고도 한다. 연미사에 있는 보물인 이천동 석불의 잔잔한 미소는 안동의 상징적인 얼굴로 잘 알려져 있다. 속칭 제비원 미륵불이라고도 불리는 이 석불은 바로 연미사의 오랜 역사에서 홀로 남은 고마운 부처이자 우리 불교사에서도 몇 되지 않는 대표적인 미륵불이다. 또한, 이 석불은 대표적 민요인 성주풀이에도 나올 만큼 백성들이 오랜 세월 동안 뿌리내리려 한 민간신앙의 대상과도 닿아 있다. 연미사가 사찰로서는 매우 작은 규모이기는 하지만 미륵불이 담고 있는 미술적, 민족적 유산 가치는 뛰어나다.

안동 이천동 마애여래입상

안동 이천동 마애여래입상

82.0M    23369     2023-11-14

경상북도 안동시 이천동

경북 안동시 이천동 오도산에 자리한 연미사의 보물인 [이천동 마애여래입상]의 잔잔한 미소는 안동의 상징적인 얼굴로 잘 알려져 있다. 속칭 [제비원 미륵불]이라고도 불리는 이 석불은 바로 연미사의 오랜 역사에서 홀로 남은 고마운 부처님이자 우리 불교사에서도 몇 되지 않는 대표적인 미륵불이다. 또한, 이 석불은 대표적 민요인 성주풀이에도 나올 만큼 민초들이 오랜 세월 동안 뿌리내리려 한 민간신앙의 대상과도 닿아 있다. 서쪽을 향한 높은 암벽에 조각된 불신위에 불두를 따로 제작하여 올린 특이한 형태의 마애불로 머리 뒷부분이 일부 손상된 것 외에는 전체적으로 보존 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불두를 따로 제작하여 불신이 새겨진 암벽 위에 얹는 형식은 고려 시대에 널리 유행하는 형식이며, 얼굴의 강한 윤곽이나 세부적인 조각 양식으로 볼 때 11세기 경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제비원가든

제비원가든

186.7M    1     2021-03-11

경상북도 안동시 제비원로 649-2
054-855-5455

여러가지 시원한 국물음식을 맛볼 수 있는 곳이다. 경상북도 안동시에 있는 한식전문점이다. 대표메뉴는 갈비탕이다.

석송가든

석송가든

798.2M    1     2021-03-10

경상북도 안동시 제비원로 539-23
054-841-7000

단체석과 개별 실을 보유하고 있는 곳으로, 매운 양념장과 콩나물을 함께 찐 잉어찜이 유명한 곳이다. 경상북도 안동시에 있는 한식 전문점이다. 대표메뉴는 잉어찜이다.

옹천21세기찐빵

옹천21세기찐빵

931.7M    1     2021-03-11

경상북도 안동시 북후면 경북대로 959-7
054-859-7058

저렴한 가격으로 독특한 찐빵을 맛볼 수 있는 곳이다. 대표메뉴는 찐빵이다. 경상북도 안동시에 있는 한식전문점이다.

경광서원

2.2Km    2052     2024-06-17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금계3길 131-24

월천서당은 조선시대 학자 월천 조목(1524∼1606) 선생이 후진 양성과 수학을 위해 1539년에 건립하였다. 현판은 퇴계 이황이 썼으며 정면 4칸, 측면 2칸의 목조 단층 와가로 중앙에는 2칸의 마루를 두고 좌, 우에 통간방을 배치한 홑처마 집이다. 월천조목 선생은 퇴계 선생의 제자로 1552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가 여러 관직을 거쳐 공조참판에 이르렀다. 진작부터 벼슬에 뜻이 없어 45차례에 걸쳐 배명이 내렸으나, 대부분은 나가지 않아 40여 년 동안 실제 봉직한 기간은 4년 남짓할 정도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을 모집, 동생과 두 아들과 더불어 망우당, 곽재우 공과 합세하여 국난극복을 앞장섰던 인물로, 퇴계 이황의 제자 가운데 유일하게 도산서원 상덕사에 종향되었다. 주변 관광지로는 안동 유교문화의 계승과 보급을 위해 세운 [세계유교선비공원]이 있다.

원주변씨간재종택 및 간재정

원주변씨간재종택 및 간재정

2.6Km    18637     2023-09-11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풍산태사로 2720-30

* 간재 선생의 혼이 묻어있는 곳, 원주변씨 간재종택 *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에 위치한 간재종택은 16~18세기에 걸쳐 창건 및 중수된 건물로서 원형이 잘 보전되고 있다. 그리고 관련 인물이 고려 충신의 후예이자 임진왜란의 공신이었다는 역사적 측면과 건물들의 독특한 공간 배치로 문화재적 가치가 인정되고 있다. 작은 산이 병풍처럼 골짜기를 이룬 자리에 정침 및 별당, 사당, 정자를 아래에서부터 위로 자연지형에 순응하면서 각각 적합한 곳에 터를 잡았다. 사대부 가의 공간 영역을 갖춘 단독 종택은 동성마을의 유형으로 발전한 한국 종가사에 흔치 않은 곳으로서 조선 선비들의 입지 및 정주관을 살펴볼 수 있는 주요 가거지로 써 가치가 있으며 현재 이곳에는 30가구 90여 명이 살고 있다. 전통문화 보고, 지붕 없는 박물관으로 불러지는 안동문화권, 그중에서도 간재종택과 정자는 하회, 내앞마을 등과 함께 또 하나의 작은 문화권을 이루며 양반 유림의 문화를 잘 간직하고 있는 우리 민족의 중요한 문화유산 중의 하나이다.

학봉종택[한국관광 품질인증/Korea Quality]

학봉종택[한국관광 품질인증/Korea Quality]

3.3Km    6243     2023-09-05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풍산태사로 2830-6
054-852-2087, 010-5263-8365

의성 김씨 종가인 학봉종택은 학봉 김성일의 8세손 김광찬이 1762년 소계서당의 자리에 옮겼다가 1964년 현 위치로 이전하였다. 제사가 많은 종택이다보니 집의 규모에 비해 대청이 넓다. 잔디밭의 넓은 마당과 다양한 수목, 기암괴석이 하나가 되는 정원에서는 정기적으로 고택 음악회도 개최한다. 학봉선생의 애국정신을 이어받아 그 후손들이 항일독립운동에 투신한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의성김씨학봉종택

3.3Km    21054     2024-08-14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풍산태사로 2830-6

학봉 김성일이 살았던 가옥, 의성김씨 학봉종택 *

의성김씨 학봉 종택은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이 살았던 가옥이다. 학봉종택은 원래 지금의 자리에 있었으나 지대가 낮아 침수가 자주 된다며 학봉의 8세손 광찬(光燦)이 1762년(영조 38) 이곳에서 100여미터 떨어진 현재 소계서당(邵溪書堂)이 있는 자리에 옮겨 살고 종택이 있던 자리에는 소계서당을 지었다 한다. 그러나 1964년 종택을 다시 원래의 자리인 현위치로 이건되었다.학봉은 류성룡(柳成龍)과 더불어 퇴계의 고제(高弟)로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27세에 사마시, 1568년(선조 1) 중광문과 병과에 합격한 이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다가 1577년(선조 10)에는 사은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1590년(선조 23)에는 통신부사로 일본에 파견되기도 하였으나 임란때에 왜적과의 전투를 독려하다가 병사하였다.

* 학봉 김성일 선생의 유물을 보관하는 곳, 운장각 *

학봉종택 외에 운장각이 있다. 운장각은 조선 선조 때의 명신이며 학자인 학봉 김성일 선생의 유물을 보관한 곳이다. 선생께서 남기신 서적·물품·친필기록 제초고 및 선조전래의 전적·문서와 후손들의 유품을 영구히 보존코자 건립하였다. 운장각에는 현재 선생이 남긴 서적, 유품, 친필기록, 고문서 56종 261점(보물), 제초고 및 선조 전래의 전적문서(보물)와 후손들의 유품 등 500여점의 유적이 소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