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7-17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다산로747번길 11
조선 중기 문신이자 실학의 대가인 다산 정약용(1762∼1836) 선생의 묘소는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정약용유적지 내에 위치해 있다. 이 지역은 마재마을이라 불리며 경기옛길 평해3길로 지정되어 정약용 유적지, 실학박물관, 다산생태공원, 수종사 등이 한강길을 따라 자리 잡고 있다. 정약용선생묘는 1972년 5월 4일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었으며 부인 풍산 홍씨와 합장되어 있다. 묘소에는 묘비와 상석, 향로석이 설치되어 있다. 다산 정약용은 18세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한국 최고의 실학자이자 개혁가로 신유사옥으로 전라남도 강진에 유배되었으나 19년 만에 풀려났다. 유배 기간 동안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500여 권에 이르는 저서를 완성하였다. 그는 조선의 개혁을 시도했으나 결국 고향인 능내리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정약용유적지에는 묘소 외에도 생가인 여유당, 다산문화관과 다산기념관이 있어 함께 관람할 수 있다. 매년 열리는 정약용문화제는 유네스코 지정 세계기념인물인 다산 선생의 실사구시 사상과 인문정신을 계승하는 남양주시의 대표 문화제로 1986년부터 이어지고 있다. 남양주 방문 시 정약용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 역사와 문화를 체험하는 여행 코스를 계획할 수 있다.
2025-03-24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 남이로
남이장군 묘는 화성시 비봉면에서 2.5km 떨어진 한양 조씨의 선산 내에 있으며 남이장군과 부인이 함께 있는 쌍분묘로 1973년 7월 10에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남이(1441∼1468)는 본관은 의령으로, 태종의 외손이며 좌의정 권람의 사위이다. 1457년(세조 3) 17세 때 무과에 급제하여 세조의 총애를 받았다. 이시애의 난(1467)이 일어나자 출전하여 용맹을 떨쳤고, 여진의 건주위를 정벌할 때에도 선봉으로 적을 무찔러 이름을 날렸고, 26세의 나이에 병조판서에 올랐다. 그러나 1468년에 28세때 예종이 즉위하자 유자광의 모함으로 역모를 꾀한다하여 죄명을 쓰고 능지처참형을 당하였다. 역적으로 몰린 남이장군의 후손들이 시신이 훼손되는 일이 없게 남이섬과 전국 각지에 남이장군 이름의 가묘를 만들었고, 고증을 거쳐 이 곳이 남이장군의 실제 묘소로 확인되어 이곳에서 후손들이 제사를 지낸다. 현재 묘역에는 장군과 부인이 합장되어 있고 봉분은 2기이며, 봉분 아랫부분은 둘레석이 둘러져 있다. 묘 앞에는 묘비가 세워져 있고, 좌우에는 문인석과 망주석이 1쌍씩 있다. 조선 초기의 예술성을 그대로 담고 있는 석인상은 경기 지역 능묘 문화의 특성을 살필 수 있어 중요하다.
2025-10-23
경기도 김포시 북변중로25번길 38 (북변동)
김포향교는 1127년에 처음 지었다고 전해지나 확실하지 않다. 향교는 원래 김포 여자종합고등학교가 있는 산기슭에 있었으나 왕의 능을 그곳에 모시게 되면서 김포읍 걸포리로 옮겼다가 다시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건물은 1960년대 이후 여러 차례 보수되어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건물의 배치는 앞쪽에 교육 공간인 명륜당과 동·서재가 있고, 뒤쪽에 제사 공간인 대성전과 동·서무가 세워져 있다. 그 외에도 재실(齋室)과 출입구인 외삼문과 내삼문이 있다. 대성전은 앞면 3칸, 옆면 3칸의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人(사람 인) 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명륜당은 앞면 5칸, 옆면 2칸 규모이며, 대성전과 달리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八(여덟 팔) 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되어있다. 명륜당 내부는 일반적으로 좌우 1칸씩 방으로 꾸미는 것과 달리 김포향교에서는 전체를 1칸으로 구성하였다. 대성전과 명륜당만 갖춘 조선 후기 작은 규모의 향교 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출처 : 국가유산청)
2025-03-27
경기도 포천시 가산면 가산로 227-40
화산서원은 1631년(인조 9)에 창건된 백사서원(白沙書院)에서 유래를 찾을 수 있다. 즉 이겸(李馦)을 비롯한 포천의 유림들이 이항복(李恒福)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가산면 옥금동에 사우를 마련, 그의 호(號)를 따서 백사서원이라 이름하였다. 그 후 1635년(인조 13)에 현 위치인 화봉산(花峰山) 아래로 옮겨 세웠다. 현재 화산서원의 외삼문 현판에 ‘인조을해건(仁祖乙亥建)’이라 새겨져있는 데에서 서원의 창건을 1635년으로 보기도 한다. 1659년(효종 10)에는 이곳 지명을 본떠 화산서원으로 사액되었다. 1746년(영조 22)에 영조는 임진왜란 당시 이항복의 공로에 감격한 나머지 승지를 화산서원에 보내 제사를 지내게 하는 한편 후손을 등용하도록 특별히 명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으며, 이후 지역 유림들이 사우 터에 제단을 세우고 향사를 계속하였다. 그러다가 1971년에 화산서원복원추진회가 결성되어 사당을 복원하였다. 동, 서재·담장·삼문·홍살문 등도 건립하였다. 서원에서는 음력 9월 12일을 기하여 향사를 지내고 있다.
2025-07-03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남사읍 처인성로 673
용인시 남사읍 아곡리에 있다. 형제봉에서 동쪽으로 능선이 이어지며 돌출된 해발 70.9m의 자연 구릉이다. 용인에서 진위로 가는 길목이자 수원-오산-안성으로 연결되는 교통의 요충지에 해당한다. 처인성의 평면 형태는 사다리꼴이며 전체 둘레는 351m다. 작은 규모지만 성 내부가 평탄하여 공간효율성은 좋은 편이다. 성벽은 남서쪽이 높고 북동쪽이 낮은 형태다. 성문은 개거식[開据式]이었으며 북동 성벽에 2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벽은 자연지형을 활용하여 낮은 지점은 판축공법으로 성토하는 방법으로 구축했다. 일정한 간격으로 나무기둥을 깊게 박고 목수와 목주 사이에 판목을 설치하고 성질이 다른 흙을 다짐하여 성벽을 조성했다. 그러나 처인성에서는 통일신라 이후의 판축토성에서 일반적으로 확인되는 기단석열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유물은 기와류와 토기류,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자기류, 대도와 화살촉등이 출토되었다. 축성법이나 출토유물을 고려하면 처인성은 신라말-고려 초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처인성은 몽고군의 2차 침입시 승전지로 잘 알려져 있다. 호원IC에서 차량으로 약 20분 소요된다. 인근에 장흥관광지, 송추유원지, 일영유원지 등이 있다. (출처 : 국가유산청 홈페이지)
2026-06-19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영화동
수원화성은 조선왕조 제22대 정조대왕이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당쟁에 휘말려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뒤주 속에서 생을 마감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원침을 양주 배봉산에서 조선 최대의 명당인 수원 화산으로 천봉하고 화산 부근에 있던 읍치를 수원 팔달산 아래 지금의 위치로 옮기면서 축성되었다. 정조의 효심이 축성의 근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쟁에 의한 당파정치 근절과 강력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원대한 정치적 포부가 담긴 정치구상의 중심지로 지어진 것이며 수도 남쪽의 국방요새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수원화성은 중국, 일본 등지에서 찾아볼 수 없는 평산성의 형태로 군사적 방어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함께 보유하고 있으며 시설의 기능이 가장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구조로 되어 있는 동양 성곽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출처 : 수원문화재단 홈페이지)
2026-03-23
경기도 오산시 경기대로 742 (외삼미동)
1982년 4월 6일에 건립된 신(新) 유엔군 초전기념비는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과 북한군이 벌인 최초의 전투에서 전사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원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세워진 기념비이다. 초전비는 북한군에 맞서 유엔군이 방어한 최초의 성벽임을 나타내는 세 겹의 높은 탑신으로 표현되고 있으며, 중앙에는 스미스 부대원의 전투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매년 7월 5일을 기하여 죽미령 전투의 의의를 기리고 전몰장병들을 추모하기 위해 추념식이 거행된다. 경기도 등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는 구(舊) 유엔군 초전기념비는 본래 오산 죽미령 전투 당시 보병 B중대 1개 소대가 배치되었던 1번 국도 건녀편의 99 고지에 위치했으나 2019년 평화공원 조성사업의 일환으로 현재 위치로 이전하게 되었다. 기단부는 이전하면서 새롭게 제작한 것이다. 1950년 7월 5일 죽미령 전투 이후인 1995년 스미스 부대 장병들이 다시 돌아와 전사한 전우들을 기리며 지역의 유지들과 함께 540개의 돌을 쌓아 만들었다. 1990년대까지 오산지역 주민들 사이에서 소위 UN탑이라 불렸다.
2025-10-23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혜음로 930
고려 중기의 문신인 윤관(1040~1111)의 무덤이다. 윤관은 고려 예종 때 여진정벌의 공이 컸던 명장·문신이다. 고려 문종(재위 1046~1083) 때 문과에 합격하였고, 숙종 9년(1104)에 ‘동북면행영병마도통(東北面行營兵馬都統)’이 되어 국경을 침입한 여진과 싸웠으나 패하였다. 그 후 여진정벌을 위해 별무반을 편성해 예종 2년(1107)에 여진을 정벌한 후 9성을 쌓았다. 윤관의 무덤은 어디에 있는지 명확히 알 수 없었으나, 조선 영조 23년(1747) 후손들이 지금의 자리임을 주장하여 영조 40년(1764)에 공인되었다. 윤관 장군묘 주변에는 후대에 세워진 비석과 석등이 있다. 위패는 예종의 사당에 함께 모셔졌고, 고려 태조와 충의공신을 모신 숭의전에서 함께 배향되었다. 1988년 2월 사적 제323호로 지정되었다. 매년 음력 3월 10일과 10월 5일 여충사에서 제향을 올리고 있다.
2026-06-16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서오릉로 334-32
서오릉(西五陵)은 ‘서쪽에 있는 5기의 능’이라는 뜻으로 경릉(敬陵), 창릉(昌陵), 익릉(翼陵), 명릉(明陵), 홍릉(弘陵)의 다섯 능을 말한다. 서오릉은 구리 동구릉(東九陵) 다음으로 규모가 큰 조선왕실의 왕릉군이다. 1457년(세조 3) 세조의 첫째 아들 의경세자(추존 덕종)의 의묘(懿墓, 경릉)가 처음 조성되었고 1470년(성종 1) 예종의 창릉(昌陵)이 왕릉으로서 최초로 조성되었다. 이후 순회세자의 순창원(順昌園), 인경왕후의 익릉(翼陵), 숙종의 명릉(明陵), 정성왕후의 홍릉( 弘陵)이 차례로 조성되어 조선시대에는 5기의 능과 1기의 원이 조성되었다. 그러다가 1970년대 영빈 이씨의 수경원(綏慶園)과 옥산부대빈 장씨의 대빈묘(大嬪墓)가 옮겨져 지금의 서오릉이 되었다.
2025-12-11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서삼릉길 233-126 (원당동)
서삼릉(西三陵)은 ‘서쪽에 있는 3기의 능’이라는 뜻으로 경기 고양시에 위치한 조선왕릉 중 서오릉 다음으로 큰 왕릉군이다. 1537년(중종 32) 중종의 두 번째 왕비 장경왕후의 희릉(禧陵)이 현 서울 서초구 헌릉과 인릉 서쪽 언덕에서 현재의 자리로 옮겨졌고, 1545년(인종 1) 중종의 정릉이 희릉 서쪽 언덕에 조성되자 능의 이름을 희릉과 합쳐 정릉이라 하였다. 그러나 1562년(명종 17) 정릉이 현 서울 강남구로 옮겨지면서 다시 희릉이 되었다. 이후 인종의 효릉(孝陵), 소현세자의 소현묘(昭顯墓, 이후 소경원(昭慶園)), 철종의 예릉(睿陵)이 조성되었다. 그러다가 일제강점기 때 전국에 있던 왕을 비롯한 왕실가족의 태실(胎室)과 왕자·왕녀·후궁의 묘와 문효세자의 효창원(孝昌園)이 서삼릉 경내로 옮겨졌다. 1945년 광복 후 의소세손의 의령원(懿寧園)이 옮겨졌고, 도시화 개발 시기에 왕실 후궁들의 묘와 폐비 윤씨의 회묘(懷墓)가 경내로 옮겨지면서 지금의 서삼릉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