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 - 국내 여행 정보

한국관광공사에서 제공하는 공공데이터를 활용하여 관광 정보를 소개합니다.

북한산성

북한산성

2026-03-12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북한산성은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과 서울시 강북구, 종로구, 은평구 경계의 북한산 정상 능선을 따라 위치하는 포곡식 석축산성이다. 백제가 수도를 하남 위례성으로 정했을 때 도성을 지키던 북방의 성으로 백제 개루왕 5년(132년)에 북한산성의 명칭으로 축조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지역은 고구려, 백제, 신라가 서로 차지하기 위해 쟁탈전을 벌였던 곳이며, 조선시대에는 도성을 지키는 중요한 곳이었다. 11세기 초 거란의 침입이 있을 때 현종이 고려 태조의 관을 이곳으로 옮겨 오기도 했다. 고려 고종 19년(1232년)에 몽고군과의 격전이 있었고, 우왕 13년(1387년)에 성을 다시 고쳐지었다. 성의 규모는 대서문, 동서문, 북문 등 13개의 성문과 불을 피우던 곳으로 동장대, 남장대, 북장대가 있었다. 현재 북한산성에는 삼국시대의 토성이 약간 남아 있기는 하나 대개 조선 숙종 때 쌓은 것으로 여장은 허물어졌고, 대서문과 장대지, 우물터, 건물터로 생각되는 방어시설 일부가 남아있다.

고양 벽제관지

고양 벽제관지

2026-03-12

경기 고양시 덕양구 고양동

고양 벽제관지는 조선시대의 객사인 벽제관이 위치했던 장소이다. 1476년(성종 7) 11월에 세운 벽제관은 우리나라에 오는 중국 사신의 공용숙박시설이 있었던 곳이다. 중국과 조선을 잇는 곳에 위치하여 당시 중국과의 외교에서 핵심적 역할을 수행했다. 이곳은 1592년 임진왜란으로 당시의 고양군청이 훼손되면서 1625년(인조 3)에 이곳으로 함께 옮겨지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총독부에 의해 그 원형이 훼손되었고, 조선총독부 2대 총독인 하세가와는 벽제관의 부속 건물인 육각정을 일본으로 불법 반출했다. 한국전쟁으로 건물과 담장이 소실되었으며, 1960년대에는 그때까지 남아 있는 삼문마저 허물어졌다. 현재는 건물의 기둥을 받치던 돌의 일부만이 남아 옛 흔적을 찾기가 힘들지만 지리적인 위치로 인한 전투와 한중외교사의 역사적인 의미가 인정되어 1965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남양주 홍릉(고종·명성황후)과 유릉(순종·순명황후·순정황후) [유네스코 세계유산]

남양주 홍릉(고종·명성황후)과 유릉(순종·순명황후·순정황후) [유네스코 세계유산]

2026-03-09

경기도 남양주시 홍유릉로 352-1

홍릉은 대한제국 제1대 황제 고종과 그의 부인인 명성황후의 무덤이다. 고종은 재위기간 중에 외세의 침략에 대처하지 못하고, 내부에서의 정치적 변화로 인해 임오군란, 갑신정변, 을미사변 등을 겪었다. 명성황후는 을미사변 때 일본인에 의해 무참히 살해당한 비운의 왕비이다. 명성황후의 무덤은 처음에 청량리에 있었으나 풍수지리상 불길하다 하여 고종의 무덤에 합장하였다. 광무 원년(1897) 대한제국 선포로 홍릉은 지금까지의 무덤 제도와 다르게 명나라 태조 효릉의 무덤 제도와 조선왕릉의 제도를 결합하였다. 유릉은 순종과 순명효황후, 순정효황후의 무덤이다. 조선왕릉 중 한 봉우리에 3개의 방을 만든 동봉삼실릉은 유릉뿐이다. 홍릉과 유릉은 철종 이전의 무덤과 다른 형식을 취하고 있다. 고종을 황제로 칭하게 됨으로 제릉으로서의 위엄을 갖추기 위해서 석물의 규모나 종류가 달라졌다. 2개의 무덤을 하나로 묶기 위해 외곽으로 담장을 설치하였으며, 양릉 중간에 돌로 만든 연못을 두었다.

권율장군묘

권율장군묘

2025-07-07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권율로 223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만취당 권율(1537~1599) 장군의 묘소이다. 선조 15년(1582)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55세 때에는 의주목사로 부임하여 북방 여진족을 방어하였다. 묘역에는 장군의 묘를 중심으로 좌우에 전부인 창녕조씨와 후부인 죽산박씨가 안장되어 있으며, 묘 앞에는 묘비와 상석, 향로석, 동자석 1쌍이 있고 좌우에 망주석과 문인석 1쌍이 있다. 권율 장군 묘 뒤쪽 언덕에는 형 권순과 아버지인 권철의 묘가 차례로 모셔져 있다. 묘역 입구에 있는 신도비는 기존의 신도비 비문이 마모되어 1861년(철종 12)에 장군의 후손들이 다시 세운 것으로 장군의 일대기와 함께 자손들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다. 묘 아래에 있는 재실은 묘를 관리하고 제사 준비를 하는 곳으로 개방되어 있지 않다. 송추IC에서 차량으로 약 10분 소요된다. 인근에 장흥관광지(청암민속박물관, 가나아트센터, 두리랜드,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양주시립민복진미술관, 송암스페이스센터, 장흥자생수목원 등), 송추유원지, 일영유원지, 북한산국립공원, 국립아세안자연휴양림, 필룩스조명박물관, 회암사지 등이 있다.

남양주 광릉(세조·정희왕후) [유네스코 세계유산]

남양주 광릉(세조·정희왕후) [유네스코 세계유산]

2025-07-07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광릉수목원로 354

광릉은 조선 7대 세조(재위 1455~1468)와 정희왕후 윤씨(1418~1483)의 능이다. 같은 능역에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능침을 조성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형식으로 조선왕릉 중 최초로 조성된 형식이다.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 언덕(서쪽)이 세조, 오른쪽 언덕(동쪽)이 정희왕후의 능이다. 1468년(예종 즉위)에 세조가 세상을 떠나자 현재의 자리에 조성되었다. 본래 이 자리는 동래 정씨 정창손의 선대묘역이 있던 자리였으나, 광릉이 조성되면서 동래 정씨 묘역은 다른 곳으로 옮기게 되었다. 세조는 “내가 죽으면 속히 썩어야 하니 석실과 석곽을 사용하지 말 것이며, 사대석(병풍석)을 세우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 유언에 따라 능 내부의 방을 석실 대신 회격(灰隔)으로 만들었는데, 이는 왕릉 공사에 드는 비용과 인원을 감소시켰다. 이 방법은 광릉 이후에 조성된 왕릉에 모두 적용되었다. 또, 병풍석이 생략되면서 병풍석에 새기는 십이지신상을 난간석에 새겼다. 이후 1483년(성종 14) 정희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광릉 동쪽 언덕에 능을 조성하였다. 이때 능의 이름을 동광릉(東光陵)으로 정하려고 하였으나 광릉과 같은 능역에 있다 하여 광릉으로 합쳤고, 정자각은 두 능 사이로 옮겨지었다.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이어진 향로와 어로는 조선시대에는 조성되었으나 현재는 소실되었고, 입구에는 조선왕릉 중 유일하게 하마비(下馬碑)가 남아 있다.

구리 동구릉 [유네스코 세계유산]

구리 동구릉 [유네스코 세계유산]

2026-05-22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로 197 (인창동)

동구릉(東九陵)은 ‘동쪽에 있는 9기의 능’이라는 뜻으로, 약 450여 년간 7명의 왕과 10명의 왕비가 잠들어 있는 조선 최대의 왕릉군이다. 1408년(태종 8) 조선을 건국한 태조의 건원릉(健元陵)이 처음으로 조성되고 이후 문종의 현릉(顯陵), 선조의 목릉(穆陵), 현종의 숭릉(崇陵), 장렬왕후의 휘릉(徽陵), 단의왕후의 혜릉(惠陵), 영조의 원릉(元陵), 헌종의 경릉(景陵)이 차례로 조성되었다. 능이 조성될 때마다 동오릉(東五陵), 동칠릉(東七陵) 등으로 불리다가 문조의 수릉(綏陵)의 옮겨지면서 지금의 동구릉이 되었다. 동구릉은 조선 전기부터 후기까지의 왕릉을 모두 볼 수 있는 곳으로, 왕이나 왕후의 능을 단독으로 조성한 단릉, 나란히 조성한 쌍릉,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능침을 조성한 동원이강릉, 한 능에 왕과 왕후를 같이 모신 합장릉, 왕과 두 왕후의 능을 나란히 조성한 삼연릉 등 다양한 형태로 조성된 능이 모여있다. (출처 :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

김포 문수산성

김포 문수산성

2026-03-11

경기도 김포시 월곶면 성동리

김포 문수산성은 갑곶진과 함께 강화의 입구를 지키던 조선시대의 성으로, 병인양요의 격전지였다. 1866년 병인양요 당시 로즈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점령하자 프랑스군이 내륙으로 침투하는 것을 미리 차단하기 위해 한성근을 순무 초관에 임명하고 문수산성의 수비를 강화하였다. 같은 해 10월 프랑스군이 70여 명이 바다를 건너오자 문수산성에 있던 조선군은 프랑스군 3명을 사살하고 2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하지만 무기의 열세로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문수산성에서 퇴각하였다. 조선군이 퇴각하자 프랑스군은 문수산성의 남문과 성벽을 파괴하고 민가 30여 호를 불사른 뒤 강화로 다시 돌아갔다. 조선군은 결과적으로 이 전투에서 패전했지만 프랑스 군대에 처음으로 일정한 타격을 주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김포 문수산성은 1694년에 돌을 이용해 쌓은 석축산성으로 1812년에 고쳐 쌓았다. 잘 다듬어진 돌로 견고하게 쌓았고, 그 위에 몸을 숨기기 위한 방어시설인 여장을 둘렀다. 당시의 성문은 취예류·공해루 등 3개의 문루와 비밀통로인 암문 3개가 있었다. 이 중 취예루는 갑곶진과 마주 보는 해안에 있었으며, 육지로 나오는 관문의 역할을 하였다. 현재 해안 쪽의 성벽과 문루는 없어지고 마을이 되었으며 산등성이를 연결한 성벽만 남아있다.

대동법시행기념비

대동법시행기념비

2026-05-07

경기도 평택시 소사동

대동법시행기념비는 대동법[大同法]의 실시를 알리기 위해 세운 비이다. 대동법은 조선시대에 세금으로 납부하던 지방특산물 대신 쌀을 납부하는 제도로, 선조 41년(1608) 경기도에서 처음 실시되었고, 100여 년에 걸쳐 확대 실시되었다. 효종 2년(1651) 김육이 충청도에 대동법을 시행토록 상소를 하여 왕의 허락을 얻어 실시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그동안 어려움에 처했던 백성들의 수고가 덜어지는 등 좋은 성과를 이루게 되자, 왕은 이를 기념하고 만인에게 널리 알리도록 하였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맨 위에 머릿돌까지 갖춘 모습으로, 각 부분의 조각은 형식에 그친 감이 있다. 비의 원래 명칭은 ‘김육대동균역만세불망비[金堉大同均役萬世不亡碑]’또는 ‘호서선혜비[湖西宣惠碑]’이다. 비문은 홍문관 부제학을 지내던 이민구가 짓고, 의정부 우참찬 오준이 글씨를 썼다. 효종 10년(1659)에 세운 비로, 원래는 이곳에서 5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으나 1970년대에 옮겨 놓았다.

천진암 성지

천진암 성지

2025-07-07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천진암로 1203

천진암성지는 우리나라 천주교 창립 선조들의(이벽, 정약종, 권철신, 권일신, 이승훈) 유해를 모신 한국천주교의 발상지라는 역사적 의미가 있는 장소이다. 성지에는 성모마리아 상, 천진암 대성당 터, 성모 성당 등 둘러볼 곳이 많이 있다. 36만여 평 성역에 3만여 평의 대성당 건립 터에서는 매년 수 만 명의 신도들이 모여 한국 천주교회 창립 기념행사를 거행한다.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

2024-08-27

경기도 화성시 향남읍 제암길 50

1,306㎡ (395평) 규모의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은 제암리 학살사건을 기리기 위한 기념관이다. 제암리 학살사건은 1919년 3.1 독립만세운동 주요인사 명단을 입수한 일본 헌병 30여명이 4월15일 오후 2시경 제암교회에 주민들을 모이게 한 뒤 모든 문을 폐쇄하여 감금시키고 교회에 불을 지른 후, 교회를 향하여 무차별 총격을 가하여 23명을 학살하고 30여채의 가옥을 불태워버린 사건이다. 제암리 학살사건이 있은 지 63년이 지나서야 마을에서 4km 떨어진 도이리 공동묘지에 평토장으로 안장되었던 유해를 발굴하여 제암교회 뒷동산 양지바른 곳에 유택을 마련하였으며 후세에 이 사실을 기리기 위한 기념비와 전시관, 교육관 조형물 등을 설치하여 나라 사랑 정신을 일깨우는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영상실에서는 제암리 사건 및 배경, 화성독립운동에 대한 동영상을 상영하고, 제1전시실에서는 1919년 화성지역에서 전개된 3.1운동의 배경과 전개과정 그리고 4월15일 일본군에 의한 제암리 학살, 유가족들의 증언, 그 후의 기록들을 사진패널과 유물, 인터뷰 영상 등을 전시하고 있다. 제2전시실은 제암리 3.1운동순국기념관 개관 20주년을 맞아하여 제암리 학살사건을 기억하고 순국선열의 독립정신을 이어가기 위해 노력했던 유족과 우리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제암리 이야기가 100여 년이 지나는 동안 우리의 이야기가 되는 과정을 자료와 영상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기념관에서는 사전예약을 하면 전문적 해설 소양을 갖춘 해설사가 제암·고주리학살 사건과 화성독립운동에 대한 해설을 제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