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목재문화체험장 - 주변 여행 및 근처 관광 명소 - 국내 여행 정보

한국관광공사에서 제공하는 공공데이터를 활용하여 거창목재문화체험장 - 주변 여행 및 근처 관광 명소 정보를 소개합니다.

거창목재문화체험장

2.9Km    0     2024-06-18

경상남도 거창군 송계로 487

거창 목재문화체험장은 대한민국 명승인 수승대 안에 위치한 목공 체험장이다. ​1, 2층은 로비전시실, 목재체험실, 영상관, 상설전시실, 기획전시, 유아체험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내부의 벽과 기둥이 모두 나무로 마감되어 있어 나뭇결이 주는 자연스럽고 아늑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곳곳에 나무로 만든 다양한 제품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는데 일상에서 쓰기 좋은 실용적인 원목 도마, 책꽂이와 같은 생활용품을 비롯하여 서랍장, 나무키보드와 마우스, 소반과 나막신 등 다양한 원목 작품들도 전시되어 있다. 영상관은 나무가 주는 이로움과 편익에 대한 영상을 상영하고 목재 관련 세미나와 워크숍을 개최할 수 있는 공간이다. 나무 상상 놀이터는 친환경적인 놀이공간에서 자연과 나무를 주제로 한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통하여 유·아동의 전인적 발달을 돕고 있다.

돌담사이로

3.0Km    18336     2024-05-20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황산1길 81

문화관광부에서 돌담마을로 지정된 전통한옥 고가 마을로 전통 한옥을 이용하여 농가맛집과 민박을 겸하고 있다. 덕유산에서 직접 채취한 산나물로 반찬을 만든다. 하루 전 반드시 예약을 해야 한다. 산 내음 밥상을 주문하면 다양한 나물과 병풍대 등 흔치 않은 나물 장아찌를 얹어 먹는 수육이 인기 메뉴이다. 여름에는 국제 연극제가 27회째 이어져오는 곳, 맑은 계곡에서 야영을 즐기며 한옥민박이 가능한 곳이다.

용암정(거창)

용암정(거창)

3.0Km    16223     2024-09-25

경상남도 거창군 용문들길 103-21

용암정은 조선 순조 1년(1801)에 용암 임석형(1751∼1816) 선생이 바위 위에 지은 정자이다. 임석형이 지은 『용암정 창건기』와 이휘준의 『중수기』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고종 1년(1864)에 보수 공사한 것으로 되어 있다. 정자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 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중앙에 방 1칸을 만들어 마루 아래에서 불을 땔 수 있게 하였고, 둘레에 난간을 설치하였다. 아름다운 풍경과 더불어 고결한 선비의 모습을 하고 있는 정자 안에는 ‘용암정(龍巖亭)’, ‘반선헌(伴仙軒)’, ‘청원문(聽猿門)’, ‘환학란(喚鶴欄)’이라고 쓴 액자가 걸려 있다.

황산전통한옥마을 신창범 가옥(거창수승대 웰빙하우스)

황산전통한옥마을 신창범 가옥(거창수승대 웰빙하우스)

3.1Km    1     2019-09-04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황산1길 85
010-5250-6298

거창수승대에 위치한 전통한옥마을에 있는 정겨운 종갓집이다.

거창 황산리 신씨고가

거창 황산리 신씨고가

3.1Km    26635     2024-08-01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황산1길 109-5

조선 연산군 7년(1501)에 요수 신권이 이곳에 들어와 산 이 후, 이 마을은 거창 신씨의 집성촌으로 번창해 왔다. 마을의 중앙에 위치한 이 집은 1927년 신도성이 건립한 근대기 주택으로 원학고가라고도 부른다. 당시 이 집의 주인은 큰 지주였다고 하는데, 이 집은 그러한 집주인의 경제력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사랑채와 안채는 모두 경남 지방의 일반적인 주택 양식인 홑집 대신에 겹집의 팔작지붕으로 지어 집주인의 부와 권위를 드러내고 있으며, 사랑채는 궁궐이나 절에서 볼 수 있는 고급스러운 장식물로 꾸몄다. 잘 다듬은 커다란 돌로 쌓은 받침돌과 기둥을 받친 주춧돌 위에 설치한 기둥 자리 등은 조선 중기 이전에는 벼슬이 높은 양반 집안에서도 보기 힘든 모습이다. 그 밖에 안채와 그 건물을 둘러싼 크고 화려하게 지은 부속건물들도 집주인의 경제력을 과시하고 있다. 그러나 안채의 늘어난 방 수, 좁아진 대청, 집안에 들어선 화장실 등은 전통의 격식에서 벗어난 것으로, 20세기 초 실용성을 중시하던 가옥의 변모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 점에서 1920년대에 지어진 이 가옥은 격식의 해체, 실용성의 증가, 심화된 경제적 계층화 등 복합적인 사회 현상을 잘 반영하고 있다.

원학고가

원학고가

3.1Km    11503     2024-08-05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황산1길 109-5
010-5359-2224

경상남도 거창 명승지 수승대가 자리한 황산마을은 거창 신씨의 집성촌이다. 마을 중앙에 위치한 원학고가는 500년의 멋이 깃든 명품고택으로, 사랑채와 안채의 웅장한 팔작지붕, 큰 대들보와 둥근 주춧돌, 궁이나 절에서 볼 수 있는 고급스러운 장식물이 명망 높은 집안임을 보여준다. 사랑채, 중문채, 대문채에서 숙박이 가능하고, 사랑채에는 욕실 겸 화장실이 딸려있다. 한옥의 고즈넉한 정취를 느끼며 여름철 거창국제연극제를 즐기기 좋다.

거창 농산리 석조여래입상

3.1Km    15223     2024-06-18

경상남도 거창군 북상면 농산리

거창 농산리의 낮은 야산 기슭에 있는 이 석불은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불상 양식을 따르고 있다. 입불상으로 자연석을 적당히 다듬어 윗면에 두 발을 새겨 놓은 1매의 대석과, 대석에 꽂아 세울 수 있도록 한 돌에 광배를 함께 조성한 불신 등 두 개의 돌로 구성되었다. 신체에 비하여 다소 머리 부분이 큰데, 얼굴이 부분적으로 손상되었지만 전체적으로 후덕한 느낌을 준다. 양어깨를 덮어 내린 통견의 법의는 가슴에서 U자형 옷주름을 이루다 잘록한 허리 부분으로부터 Y자형으로 갈라져 양 대퇴부에서 대칭적인 의문을 이루는 이른바 우전왕(Udyana王)식 옷주름의 형태를 나타내고 있다. 이와 같은 형태는 통일신라 700년 전후 추정의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사암제불입상을 비롯하여 719년명 감산사상, 730년~760년 경 추정의 경주 굴불사지 사면석불 남면 불입상 등 8세기 이후 불상들에서 나타나는 양식적 특징으로 이 불상의 조성시기를 추정하게 해 준다. 두 발은 불신과 별도로 대석 위에 조각되어 있는데 마멸과 손상이 심하여 왼쪽 발가락 일부만 형태를 유지할 뿐이다. 우측 상단부가 깨어져 나간 광배는 불신과 한 돌로 이루어진 배 모양의 주형거신광으로 어느 정도의 형태는 유지하고 있으나 화염문 등 구체적인 문양 표현은 알 수 없다. 비록 부분적인 파손이 있으나 이 불상은 야산의 구릉에서 원위치를 지키고 있는 귀중한 불상으로 규모가 비교적 크고 정제된 조각수법을 보여주고 있으며 비슷한 예가 많지 않은 점에서 가치가 있다.

거창 황산마을 옛 담장

거창 황산마을 옛 담장

3.1Km    29485     2024-05-23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황산1길 109-5

거창 황산마을은 18세기 중엽에 황고(黃皐) 신수이가 입향하면서 번성한 거창신씨 씨족마을로, 마을의 생성은 16세기 초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조선시대 영조 이후 인물이 연이어 배출되었다고 전해진다. 마을 어귀에는 군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는 폭 5m 이상, 높이 15m 이상의 수령 600년에 달하는 고목이 자리하고 있어 마을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으며 마을에서는 이 고목을 안정좌(安亭座)나무라고 부르고 있다. 마을은 대체로 평탄하며 마을 동측에 흐르는 호음천을 중심으로 큰땀과 동촌으로 구분되어 있다. 마을 내 주택들은 대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건립된 것으로 한말과 일제강점기 지방 반가의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며 규모와 형식면에서 월등함을 보여주는 시도민속자료 ‘거창 황산마을 신씨고가’ 등의 지정문화재는 전통마을로서의 가치를 더해주고 있다.

마을 전체는 약 50여호로 거의 안채와 사랑채를 갖추고 있으며 이렇게 한 마을 전체가 모두 기와집으로 무리지어 있는 것은 이른바 씨족부농촌으로 소작마을을 별도로 두었기 때문이다. 이 마을의 담장은 대개 토석담으로 담 하부 2~3척 정도는 방형에 가까운 제법 큰 자연석을 사용하여 진흙을 사춤하지 않고 대부분 메쌓기 방식으로 쌓았다. 이는 도로보다 높은 대지 내 우수(雨水)를 담 밖으로 자연스럽게 배출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자연석으로 메쌓기 한 위에는 하부의 자연석보다 작은 20㎝ 내외의 돌을 담 안팎에 사용하여 진흙과 교대로 쌓아 올렸고 대부분 담장 상부에는 한식기와를 이었으며 또한 근년에 쌓은 담장은 기존 담장과 달리 엇쌓기를 하였다. 마을의 시한당 앞 연못은 일반적인 한국 전통의 연못양식인 방지원도형(方池圓島形)이 아닌 원지방도형(圓池方島形)으로 구성되어 있어 독특하다. 전반적으로 전통고가와 어우러진 활처럼 휘어진 전통 담장길은 매우 고즈넉하고 아늑한 느낌을 주고 있다.

* 담장 - 토담길이 약 1,200m의 돌담, 하부가 돌담 구조인 토석담
* 마을형성 - 600년전 형성
* 문화재 - 거창 대정리 신씨고가(경상남도 민속자료) 등 3건

황산전통한옥마을

3.1Km    35188     2024-09-25

경상남도 거창군 황산1길 109-5 대정리신씨고가

황산전통한옥마을은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황산리에 위치한 전통한옥마을로 수승대국민관광단지 건너편에 있다. 1540년(조선 중종35년)에 요수 신권 선생이 이곳에 은거하며 1540년 '구연재'를 세우고 후학들을 양성했던 이후로 거창 신씨의 집성촌 마을이 되었다. 이 '구연재'는 1573년 신권선생이 죽자 사림에서 '구연서원'으로 개칭 하고, 석곡 성팽년과 함께 배향하였다. 이후 황산마을은 18세기 중엽 조선 영조 때 노론계 학자인 황고 신수이 선생이 입향을 하면서 번성하게 되었다. 이곳 황산전통한옥마을의 가옥들은 대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건립된 건축물로 대한제국 말기와 일본 강점기 시대의 지방 반가의 전통 한옥 건축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는 곳이다. 남아 있는 한옥은 약 50여 호로 안채와 사랑채를 갖추고 있고, 모두 기와집으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씨족 부농촌의 모습을 보여준다. 마을의 담장은 제법 큰 자연석을 이용한 토석담으로 약 1.2Km에 걸친 활처럼 휘어진 전통 담장길은 전통고가와 잘 어우러져 매우 고즈넉하고 아늑한 느낌을 준다. 마을에 들어서면 입구에 높이 15m, 수령 600년에 이르는 '안정좌'나무라 부르는 느티나무가 자리하고 있다. 마을 중앙에는 "거창 황산리 신씨고가"가 자리 잡고 있는데, 1927년 옛 건물을 허물고 새로 지은 건물로 '원학고가'라고도 부른다. 이 가옥은 경상남도 민속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안채, 사랑채, 중문채, 곳간채, 솟을대문, 후문 등으로 이루어져 있고, 특히 사랑채는 궁궐에서나 볼 수 있는 고급스러운 장식물로 꾸며져 있어 당시 큰 지주였던 집주인의 재력을 엿볼 수 있다. 안채는 많이 개수되어 전통한옥의 격식에서는 많이 벗어난 모습을 보여 준다.수승대국민관광단지에 깨끗한 민박과, 호텔 등 숙박을 할 수 있는 곳이 있지만, 이곳에서 도보로 이동 가능한 황산전통한옥마을에서 옛 조상들의 주거생활을 체험해 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거창은 오래전부터 산이 높고 물이 맑은 고장으로 이름난 곳이다. 낮에는 시원한 계곡에서 물놀이를 즐기고, 밤에는 황산마을에서 전통한옥체험을 한다면 여름 휴가철을 즐기기에 안성맞춤일 것이다. 황산전통한옥마을은 덕유산, 가야산, 지리산에서 가깝고, 인근에 송계사계곡, 거창조각공원, 금원산자연휴양림, 월성계곡, 거창박물관, 화계사, 쌍계사계곡 등의 관광지가 있다.

모리재

3.2Km    15193     2024-08-28

경상남도 거창군 북상면 강선대길 96-326

거창 모리재는 동계 정온(1569~1641)선생을 기리기 위한 재실이다. 정온은 남명 조식의 학맥을 계승하고 한강 정구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1610년(광해군 2)에 진사로서 문과에 급제하였다. 1614년에 부사직으로 재임하던 중 영창대군의 처형은 부당하다고 상소하고, 가해자인 강화부사 정항의 참수를 주장하다가 광해군의 노여움을 사 제주도 대정에서 10년간 유배 생활을 하였다. 모리재는 동계 정온이 사망한 뒤 선생의 덕과 애국충절을 기리기 위해 지역의 유림들이 지은 건물이다. 정문으로 사용된 화엽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2층 누각으로, 자연석을 둥글게 다듬은 기둥을 세웠다. 화려한 팔작지붕의 처마가 처지는 것을 막기 위해 사방 처마 끝에는 받침기둥을 세워 지붕을 떠받쳤다. 본당인 모리재는 자연석 초석 위에 정면 6칸, 측면 2칸의 일자로 된 팔작지붕의 건물로, 지역의 유림들이 모여 선생의 학문을 추모하며 공부하였던 곳이다. 모리재는 재실로서 특이하게 남부 지방의 민가 형식을 띠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규모도 매우 큰 편이라 할 수 있다. 현재의 건물은 1921년에 중수한 것이며, 유생들의 생활공간이었지만 지금은 관리사로 쓰는 서무와 사당 등의 건물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