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Km 2024-08-19
광주광역시 동구 백서로125번길 32-5 (금동)
062-233-3200
골드브라운호텔은 광주광역시 충장로에 위치한 숙소로, 아시아 문화 전당, 양림 펭귄 마을, 동명동 맛집, 남광주 시장 등에 접근성이 좋아 여행에 편리하다. 방이 넓고 큰 에이스 침대에서 포근한 취침이 가능하며, 철저한 관리로 전객실을 깨끗하고 쾌적하게 유지한다. 1층 로비에서 토스트, 훈제계란과 음료수 등 무료로 제공하여 언제든지 이용할 수 있고, 고데기도 이용 가능하다. 합리적인 가격으로 이용할 수 있어 가성비가 좋다.
9.3Km 2024-08-07
광주광역시 남구 제중로 60
이곳의 선교기념비는 광주광역시에서 최초로 진행된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 배유지의 예배를 기념하여 세워진 비석이다. 광주광역시립사직도서관 인근의 도로변이나 비가 세워진 장소에 개신교의 예배 장소로 쓰인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비에는 ‘선교기념비’ 다섯 글자만 새겨져 있으나, 받침돌에 박힌 별도의 돌에 ‘이곳은 하나님의 보내심 받아 1904년 12월 25일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 배유지 목사가 광주에서는 처음 예배드린 곳으로 그 거룩한 뜻을 길이 기리어 여기 돌비 하나 세우니라. 1982년 12월 6일 대한예수교장로회 전남노회 삼가 세움’이라는 글귀가 한글과 영문으로 새겨져 있다. 선교사 배유지가 진행한 최초의 예배는 훗날 제중원 선교사들의 임시사택 자리에서 진행되었다고 하며, 1982년 당시에는 선교기념비가 세워진 장소가 그 위치인 것으로 알려졌었다. 이후 관련 문헌 등을 통해 지금의 광주기독병원 내에서 제중원 터의 정확한 위치가 확인되어 이를 기리는 기념비가 새로 건립되었다.
9.3Km 2023-09-05
광주광역시 동구 동명동
핫플레이스로 떠오르고 있는 동명동 카페거리는 1970~90년대를 정점으로 고급 주택과 오래된 한옥들이 혼재된 광주의 대표적인 부촌이었다. 한때 원도심 침체에 따라 활기를 잃기도 하였지만, 학원이 동명동에 집중되며 부모들을 위한 카페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 카페들이 점차 개성을 가지고 독특한 인테리어와 음료를 추구하면서 다양한 스타일의 카페들이 들어서며 오늘의 로컬 브랜드로 자리 잡은 동명동 카페거리가 만들어졌다. 독특한 분위기와, 다양한 스타일과 테마의 카페들이 모여 있어 방문객들은 자신에게 맞는 분위기와 메뉴를 선택할 수 있다. 구도심 골목에 생겨난 카페거리라서주차가 원활하지 않으나 근처에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부설주차장이 있다. 동리단 길은 골목길과 작은 공원이 많이 있어 산책이나 휴식을 즐길 수 있는 좋은 장소이다. 현재는 바닥에 쓰인 글과 이색적인 그림의 벽화도 볼만하고 이색 카페, 예술 작품, 쉼터로 떠오르는 여행 스팟이 되었다.
9.4Km 2024-10-02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 225-25(호랑가시나무아트폴리곤)
양림동은 1899년 남 장로교의 선교사 배유지, 오웬 두 사람이 목포에서 광주로 이주하여 전도를 시작했던 지역이다. 그때부터 자라고 있는 호랑가시나무는 현재 철책으로 둘러싸여 보호되고 있다. 양림동 호랑가시나무길에는 옛 선교사 사택과 아트 폴리곤, 호랑가시나무 창작소 등 다양한 문화공간과 관광지가 위치해 있다. 호랑가시나무는 전남 남해안과 제주 서해안에 주로 자생하는 상록활엽수 교목이다. 변산반도가 북쪽 한계선이며 중국에도 분포하나 특히 광주, 전남의 나무라고 할 수 있다. 잎은 두꺼운 가죽질과 광택이 있으며 잎끝에 가시 모양의 톱니가 다섯 개 있다. 꽃은 여름철에 흰빛으로 잎겨드랑이에 모여서 가을에 핵과가 붉게 익는데, 겨울철 눈 속에서도 붉은빛을 띠어 관상수로도 제격이다. 양림동의 호랑가시나무는 높이가 6m 정도이며 근원부의 간주가 115㎝로 이 수종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거목이다. 수관의 너비는 남북 7m, 동서 5m이며 가슴 높이에서 두 갈래로 갈라져 있다.
9.4Km 2024-07-23
광주광역시 동구 문화전당로 38 (광산동)
062-601-4692
제15회 2024 ACC 월드뮤직페스티벌 장르와 국경을 초월하는 무경계 음악축제이다. 15회를 맞이하는 ACC 월드뮤직페스티벌은 한국 대중음악사를 대표하는 ‘김창완 밴드’부터 페르시안 음악의 거장 ‘카이한 칼호르 트리오’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의 무대가 펼쳐질 예정이다.
9.4Km 2024-04-25
광주광역시 동구 문화전당로 38
1899-5566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어린이‧가족문화축제‘HOW FUN 10’(이하‘하우펀’)을 5월 4일(토)부터 5월 5일(일)까지 ACC 어린이문화원일대 에서 개최한다. 올해로 10회째를 맞는 하우펀은 ‘도시따라 지구 한바퀴’라는 도시 문화 주제 아래 도시의 과거-현재-미래와 잇는 문화적 현상과 도시를 이루는 다양한 요소들을 관찰하고, 탐험하고 창조하는 놀이와 교육적 요소를 결합한 작가 연계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이번 축제는 체험‧공연‧교육 등 다양한 장르가 어우러진 복합문화축제로 구성돼 가정의 달 5월에 풍성한 즐길 거리를 제공하며 싱가포르, 핀란드, 일본, 우즈베키스탄 등 해외유관기관과의 협력을 통해 어린이들이 다채로운 체험을 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구성 했다.
9.4Km 2024-04-18
광주광역시 동구 문화전당로 38 (광산동)
062-608-2403
광주 역사의 중심인 동구의 문화유산과 광주의 역사를 달빛 아래에서 만나보는 ‘광주 문화유산 야행’은 지역의 문화유산과 주변의 문화시설을 연계하여 다양한 역사문화체험의 기회를 제공하는 야간향유형 문화유산 테마 관광축제이다. 8야(夜)로 구성된 광주 문화유산 야행은 야경(야간경관), 야로(역사투어), 야사(체험), 야화(전시), 야설(공연), 야식(먹거리), 야시(장터), 야숙(숙박)을 통해 동구의 문화유산을 다채롭게 즐길 수 있다.
9.4Km 2024-04-30
광주광역시 동구 문화전당로 38 아시아문화전당
062-601-4665
2024 아시아컬처마켓은 다양하고 풍부한 아시아 문화의 상호작용을 경험할 수 있는 행사이다. 여러 체험과 공예품을 통해 아시아의 아름다움과 다양성을 체험할 수 있다. 더불어 아시아를 담은 다채로운 공연과 이벤트를 통해 아시아 문화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참여자 간 교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9.4Km 2024-07-25
광주광역시 동구 문화전당로 38 (광산동)
062-601-4665
국내외 우수한 애니메이션을 한 곳에서 즐기고 체험할 수 있는 애니메이션 모꼬지가 펼쳐진다. 올해로 3회를 맞이하는 애니메이션 모꼬지는 남녀노소 누구나 사랑하는 애니메이션을 관람객 여러분께 선보이는 쇼케이스 행사이다. 애니메이션을 사랑하는 많은 관람객이 방문하여 행사를 즐겼고,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은 조기 매진되는 등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이러한 성원에 힘입어 올해 개최되는 애니메이션 모꼬지는 더욱 풍성하고 다채로운 프로그램으로 여러분을 찾아간다.
9.4Km 2023-10-31
광주광역시 광산구 광곡길 73
조선시대 후기 정자인 칠송정은 함재 기효증(1551~1616)의 작은 정자이다. 아버지 고봉 기대승을 3년간 시묘살이 했던 곳으로 원래는 구들이 놓인 움막집 형태로 그의 만년에 지냈던 정자다. 《광주읍지》(1924)에는 주의 북쪽 50리 떨어진 너브실마을에 있다고 했다. 지금 정자는 원래에 위치에서 중건하면서 옮겨지었다. 광산구 임곡동 소재지에서 장성읍으로 향하다 보면 오른편에 광곡(너브실) 마을이 나온다. 이 마을 입구에는 고봉 기대승의 도학사상을 잇기 위한 고봉학술원이 있는데, 그 옆에 칠송정이 있다. 이 마을 안쪽에는 고봉을 배향한 월봉서원이 백우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정자 주변에 직접 일곱 주의 소나무를 뜰 앞에 심어 사계절 불변의 지조를 지닌 소나무의 절개를 본받았다는 뜻으로 정자의 이름을 칠송정이라 하였으나 지금은 일곱 그루의 소나무는 남아 있지 않다. 정자의 정면에 올려져 있는 [칠송정(七松亭)] 현판의 글씨는 한말의 거유 석촌 윤용구(1853∼1939)가 행서로 썼으며 이 당시에 중수 또는 보수를 했을 것으로 여겨지며 칠송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팔작지붕이며 방은 들이지 않은 누각형의 정자로 마루 위에는 현판 외에 두개의 편액을 볼수 있다. 후손으로 8세손 기봉국의 [호산승처필명정(湖山勝處必名亭)]의 편액이 있고 1905년(고종42)에 10대 손 기동준이 쓴 [칠송정중건기(七松亭重建記)]의 기문이 있다. *고봉 기대승 고봉 기대승은 이황과 성리학을 문답하여 「사단칠정」에 관한 편지만도 8년을 계속해서 교환했으며, 뒤의 유학자들 중 이 문제를 언급하지 않은 사람들이 없을 정도로 성리학 연구의 기초를 마련했다. 나중에는 이황도 그의 이론을 많은 부분 받아들이게 되었고, 후학이긴 하지만 거의 동등한 관계를 유지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