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m 23211 2022-05-19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주석로80번길 139
봉림사(鳳林寺)는 경기도 화성시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 2교구 용주사의 말사이다. 신라시대 고구려의 침략을 불도의 힘으로 막기 위해 창건되었고, 궁궐에서 기르던 봉황이 나투었다고 하여 세워진 봉림사는, 정말 편안하고 한적하며 아담한 사찰이다. 하지만 이런 조용하고 분위기 있는 사찰이 세월의 풍파 속에 공장지대로 바뀌고, 인근 한적한 시골마을이 택지개발을 위해 깎여나가는 수모를 겪고 있어 보는 이를 안타깝게 한다.초입도 자칫 안내판을 놓치면 쉽게 지나칠 수 있을 정도로 정비되지 않아 처음 절을 찾는 이들을 당황케 한다.
그러나 흙먼지 날리는 대로에서 벗어나 새들의 지저귐과 푸르른 송림이 우거진 비봉산으로 오르는 길은, 역시 산사로 가는 길 다워 절을 찾는 이들의 마음을 밝게 한다. 아직 정비되지 않았지만 여법하게 들어선 천왕문을 지나 가람에 들어서면 올망졸망 세워진 전각과 요사채들이 편안함을 준다. 화성에서 용주사 다음으로 국가지정문화재를 많이 소유한 사찰답게 가람 내부는 정갈한 맛이 풍기며, 주변 환경 역시 건물과 나무가 적재적소에 어울리게 배치되어 있어 편안함이 묻어 난다.
특히 1978년 현재 극락전에 봉안된 목조아미타여래좌상에서는 수많은 복장품이 쏟아져 나와 학계와 화성시민들의 관심을 얻게 되었으며, 몇 안되는 고려시대 목불의 봉안처로서 봉림사는 꽤 유명해졌다. 흐트러짐 없고 금색 찬란한 미소를 머금은 고려 아미타불을 친견하고 싶거든 푸르름이 절정을 이르는 5월에 찾아오는 것도 좋을 듯하다. 부처님 탄신일 즈음해서 아담한 가람 안에 화려한 연등이 필 무렵, 떨어지는 서해바다의 석양은 이곳이 아미타불이 계신 극락정토임을 환희심으로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1.3 Km 18712 2022-12-29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남양리
조선 세종의 후궁 신빈 김씨(1404~1464)의 묘로서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신빈 김씨의 본관은 청풍이며 첨지중추원사 김원(金元)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아름답고 덕이 있었으며 12세에 궁에 들어가 세종을 섬겼으며 1428년(세종 10) 소용(昭容, 종2품), 1433년(세종 15) 소의(昭儀, 정2품), 1439년(세종 21) 귀인(貴人, 종1품)을 거쳐 1447년(세종 29) 정1품 신빈(愼嬪)에 봉해졌다. 자손으로는 계양군, 의창군, 밀성군, 익현군, 영해군, 담양군 등이 있다. 1450년 세종이 서거한 후 머리를 깎고 계구를 받아 자수궁(慈壽宮)에 기거하다가 1464년(세조 10) 병환으로 졸하였다. 신빈 김씨의 묘역은 일반 사대부의 묘역을 따르지 않고 왕실의 원묘(園墓)를 따르고 있다. 3개의 단으로 구성되어 있는 묘역의 가장 윗부분에는 곡장이 둘러쳐져 있는 가운데에 높이 2.2m, 둘레 24m의 봉분과 상석(床石), 혼유석(魂遊石), 향로석(香爐石)이 위치해 있다. 가운데 부분에는 장명등(높이 2m)과 문인석(높이2.5m) 2기가 설치되어 있다. 장명등에는 연꽃과 난초의 문양이 새겨져 있으며 문인석은 복두에 공복을 입은 모습으로 몸체에 비해 귀가 상당히 큰 것이 특징이다. 묘역의 동남쪽에 신빈 김씨의 행적을 적은 묘표가 세워져 있다.
1.9 Km 1514 2023-02-22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시청로 290
031-268-1000
롤링힐스 호텔은 경기도 화성에 위치하고 있으며, 자연 속에 둘러 쌓여 일상에서 벗어나 온전히 휴식하기 좋은 호텔이다.
호텔 로비, 레스토랑, 야외 수영장 등 실내 공간에서 전면 유리를 통해 자연의 채광과 풍경을 온전히 느낄 수 있다. 또한 호텔 곳곳에 모던 컨템포러리 아트 작품이 전시되어 있어 예술의 품격을 느끼며 편안한 휴식을 즐길 수 있다.
넓은 객실과 수영장 및 사우나를 완비한 피트니스와 레스토랑, 바, 키즈존 등 다채로운 부대시설이 갖춰져 있다. 더불어 50여종의 나무와 식물들로 아름답게 가꿔진 정원과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어 호텔 안에만 머물러도 자연을 만끽하며 편안하고 아늑한 휴식을 만끽하기에 충분하다.
1.9 Km 31566 2023-06-02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남양성지로 227
031-356-8950
남양옛날불낙지는 경기도 화성시 남양동에 위치한 낙지요리 전문점이다. 이곳은 여러 가지 메뉴를 선호하 기 보다 오로지 낙지만을 이용해 요리한 메뉴를 판매하며 불낙지를 주문하면 산낙지가 불낙지로 조리되는 과정을 볼 수 있다. 남양옛날불낙지는 고객들에게 낙지의 신선하고 부드러운 고유의 맛을 전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2.1 Km 17520 2022-07-22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남양리
삼학사의 한 사람인 윤집의 형으로 병자호란 때 적에게 패하였으나 적에게 굴하지 않고 장렬히 순국한 남양부사(南陽府使) 윤계(1585~1636)의 충절을 기리는 비로, 도 유형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윤계의 본관은 남원, 자는 신백(信伯), 호는 신곡(薪谷),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1627년(인조 5)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1636년(인조 14) 2월 남양부사(南陽府使)에 임명되었다. 병자호란이 발발하여 남한산성이 포위되고 남양까지 침입한 청군의 기습에 의해 패하여 적의 포로가 되었으나 굴하지 않고 대항하다가 적의 칼에 난도질을 당하고 장렬히 순국하였다. 후에 참판으로 증직되고 1668년(현종 9) 그의 순국을 기리기 위해 이 비가 세워졌다. 비의 모양은 윗부분이 타원형으로 되어 있고 목개석이 없으며, 비신의 높이는178cm, 폭 75cm, 두께는 23cm이다. 기단은 가로 127cm, 세로 92cm, 높이 20cm인 대리석으로 되어 있으며, 전각 몰딩 부분에는 복연문이 조각되어 있다. 비문각의 글자는 오랜 세월이 경과하였음에도 마멸의 흔적이 심하지 않아 비교적 선명하게 남아 있다. 비문의 글은 송시열이 지었고 글씨는 송준길이 썼다.
2.3 Km 1 2022-11-14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화성로 1393-27
서울에서 가까운 화성 시청 인근에 자리 잡은 골프 클럽이다. 아담한 9홀 규모에 상대적으로 저렴한 퍼블릭 골프장으로 9홀을 2바퀴 플레이한다. 양쪽으로 나무가 잘 심어져 있어 조경이 아름답고 코스는 각 홀마다 특색 있게 구성되어 있다. 부킹 매니저나 앱을 통해 조인 플레이가 가능해 당일에도 어렵지 않게 라운딩을 할 수 있다. 스마트 스코어 시스템이 도입되어 스마트폰으로 스코어를 편리하게 확인할 수 있다. 주차장은 여유 있을 만큼 넓고 75타석 규모의 드라이빙 레인지에는 국내 최고 프로들이 참여하는 골프 아카데미가 있다. 도심 속 스트레스를 가까운 곳에서 산림욕 하듯 라운딩 할 수 있어 많은 골퍼들이 찾는 곳이다.
2.6 Km 30245 2023-09-27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남양성지로 112
남양 성모 순례지는 병인년(1866년) 대박해 때 많은 순교자들이 피 흘리며 죽어간 무명 순교지이다. 이곳에서는 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는데 치명일기(致命日記)와 증언록에 기록이 전해지는 남양의 순교자는 충청도 내포 사람 김 필립보와 박 마리아 부부, 용인 덧옥돌 사람 정 필립보, 수원 걸매리 사람 김홍서 토마 네 사람뿐이다. 남양 순교지는 다른 순교지와는 달리 무명 순교자들의 치명터였기 때문에 오랜 세월 동안 무관심 속에 방치되어 오다가, 1983년부터 성역화되기 시작하였다. 그 후로 많은 어려움 속에서 작은 정성들을 모아 가꾸어져 오던 남양 순교지는 1991년 10월 7일 로사리오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축일에 성모께 봉헌되고 한국 천주교회 사상 처음으로 성모 순례지로 공식 선포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곳은 화성시에서 화성 8경 중의 하나로 지정하여 홍보하고 있을 만큼 아름답게 가꾸어져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은 남양순교성지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화강암의 대형묵주알, 그리스도왕상, 성모동굴, 오솔길 소자상, 요셉성인상 등이 있으며, 아늑하고 성스러운 분위기 조성을 위한 성지 조성사업을 대대적으로 실시, 성모님 품 같이 아늑하고 포근한 경관을 지닌 곳으로 시민은 물론 전국의 천주교 신도들의 순례지 겸 휴식장소로도 잘 알려져 있다. * 순교지로서의 남양 조선조 때 남양은 서해안의 군사적 요충지로서 행정과 사법권을 부여받은 종삼품의 도호부사가 부임했던 곳이다. 남양부사는 경기도 관찰사의 감독 아래 이반행정에 관한 권한 외에도 민사소송과 형사범을 다루는 사법권까지 갖고 있었다. 그래서 남양은 물론 그 인근에서 붙잡은 천주교인들을 도호부사가 있던 남양으로 끌어다가 처형했다. 그리고 남양은 지리적으로도 신앙 활동이 자유로웠던 중국과의 연락이 용이한 서해안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조 당시 이곳에는 많은 천주교인들이 찾아들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남양과 이웃해서 백학 교우촌이 있던 것도 이곳이 순교지가 된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이다. * 기록에 나타난 순교자들 - 김 필립보(1818~1868) 충청도 내포사람으로 조모의 가르침에 따라 입교하려 했으나, 부친의 반대로 어려움을 겪은 후 후일 반대하던 부친과 함께 교리를 배워 영세했다. 전교도 열심히 했고 사제의 공소 방문 때는 사제의 성무를 도왔으며 교우들이 바른 성사를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병인년 대박해 때 피신하여 살다가 1868년 남양 감영 포졸에게 아내 박 마리아와 함께 붙잡혀 남양으로 끌려왔다. 이 부부는 온갖 형벌에도 배교치 않았으며 한달 동안의 옥고 끝에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당시 나이 50세였다. - 박 마리아(1818~1868) 순교자 김 필립보의 아내로 1868년 남편과 같이 남양 감영 포졸에게 잡혀서 남편과 함께 남양으로 끌려와 한달 동안의 옥고와 가혹한 형벌을 이겨내고 남편 김필립보와 같이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당시 나이 50세였다. - 정 필립보(?~1867) 경기도 용인의 것옥골에서 살았는데, 1866년 11월 남양 감영의 포졸에게 붙잡혀 가옥한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다음 해 1867년 1월에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 김홍서 토마(1830~1868) 수원 갈매리 사람으로 1868년 남양 감영의 포졸에게 아내와 함께 감옥에 끌려왔다. 아내는 배교하여 풀려났으나, 김홍서 토마는 끝내 배교치 않고 김 필립보 부부와 함께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배교한 아내는 김홍서 토마가 순교하자 시신을 찾아 장례를 치렀다. 순교자 김홍서의 나이는 38세였다.
2.6 Km 1 2023-02-23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화성로 1238
2대에 걸쳐 운영하고 있는 곰탕집이다. 장작불을 이용 가마솥에 끓이는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왕갈비탕, 꼬리곰탕, 차돌곰탕이 인기 메뉴이며 신선한 고기를 정성껏 손질하고 양념하여 맛을 유지한다. 여름에는 냉면도 판매한다. 캠핑장이나 골프장 이용 후 방문하는 손님이 많고 대로변에 위치해 있어 드라이브하다. 들르는 사람도 많다. 모든 메뉴는 포장도 가능하고 별관에서는 매운 갈비찜도 판매한다. 한우 사골과 수입산 차돌박이, 양지 육고기를 조합하여 나오는 육수의 맛이 깊다.
2.6 Km 1 2022-10-26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남양리 1165-36
5일장으로 1일과 6일에 장이 선다. 다른 시장에 비해 큰 규모는 아니지만 인근 농가에서 생산한 무공해 농산물과 생필품을 만날 수 있다. 관광객들도 많이 찾는 전통시장이다.
3.2 Km 18770 2023-02-22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홍난파길 32
우리나라 현대음악의 여명기를 개척한 난파 홍영후(1898~1941년)의 생가이다. 홍난파는 1898년 4월 10일 홍순의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1912년 YMCA 중등부를 졸업하고 1915년 조선정악전습소양악부를 마친 뒤 동 전습소의 교사가 되었다. 1918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우에노 음악학교에서 2년간 수학한 뒤 귀국하였으며, 1920년「봉선화」를 작곡하였다. 1922년 연악회(硏樂會)를 창설하였고 1925년 바이올린 독주회를 가졌다. 한편 한국 최초의 음악잡지 『음악계』를 발간하였을 뿐 아니라 소설도 발표하여 문학적 재질도 보였다.
1926년 다시 일본 도쿄 고등음악학교에 편입하고 이듬해 도쿄교향악단의 제1바이올린 연주자가 되었다. 1929년 귀국하여 중앙보육학교 교수를 역임하였고, 1931년 미국으로 건너가 셔우드음악학교에서 연구하고 1933년 귀국하였다. 귀국 후 이화여전 강사를 지낸 뒤 경성보육학교 교수로 전임하였다. 1935년부터「백마강의 추억」등 모두 14곡의 대중가요를 나소운이라는 예명으로 발표하기도 하였다. 1941년 8월 지병인 늑막염이 악화되어 43년간의 길지 않은 생을 마감하였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봉선화」,「성불사의 밤」,「옛동산에 올라」등 가곡과,「달마중」,「낮에 나온 반달」 등의 동요곡이 있다.
현재의 생가 건물은 당초 멸실되었던 것을 1986년에 복원한 것으로 목조 초가 4칸의 ‘ㄱ’자형 구조이다. 방 2개와 부엌으로 단촐하게 구성된 집에는 아담한 마당이 딸려있고 건물 처마 밑으로 난파의 초상화와 생전에 사용했던 유품을 찍어놓은 사진 몇 장이 걸려 있다. 아늑한 마을에 자리한 초가를 둘러보노라면 ‘고향의 봄’ 가락이 곳곳에서 들리는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