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Km 2024-08-01
광주광역시 북구 경양로165번길 23
062-528-0012
아늑함과 청결함을 갖춘 광주헤이파티는 광주역 건너편에 위치하고 있다. 조식으로 한식과 브런치를 무료 제공하고, 열쇠가 달린 개인 사물함, 여성 여행자를 위한 파우더룸도 제공하고 있다. 인근에 무등산이 있어 관광하기 좋고, 남도의 맛과 인심이 담긴 남도한정식과 떡갈비를 맛볼 수 있다.
5.3Km 2023-12-26
광주광역시 북구 중흥로140번길 19 (중흥동)
062-514-1988
호텔 여기 어때 광주역점은 광주 북구에 위치하고 있으며, 광주역 도보 3분 거리, NC백화점 도보 1분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전 객실에 스타일러 비치(좋은 방 제외), 전 객실 고데기 및 드라이기, 라텍스 매트리스, 최신형 PC 등 광주 북구 최고의 시설을 자랑하는 신축호텔이다.
5.3Km 2023-08-02
광주광역시 광산구 하남대로54번안길 133
도심 속에서 숲을 접하고 자연 속에서 힐링할 수 있는 경암근린공원은 광주 광산구 하남동에 자리 잡고 있다. 다양한 체육활동을 할 수 있는 다목적 운동장과 함께 광장, 어린이 놀이터 등이 갖추어져 있으며, 잘 정돈된 산책로와 휴게시설도 마련되어 있다. 또한, 유아 숲체험원이 조성되어 있어 어린이들이 자연 속에서 다양한 놀이와 함께 자연을 직접 체험할 수 있고, 어린이들이 좋아할 만한 조형물 및 다양한 체험시설을 갖추고 있어 어린이와 함께 나들이하기에 좋다. 그뿐만 아니라 보행 약자를 위한 무장애 나눔 길이 설치되어 있어 거동이 불편한 보행 약자들도 쉽고 편하게 숲을 체험하고 안전하게 산책할 수 있다.
5.3Km 2024-05-21
광주광역시 동구 금남로 일대
광주광역시 동구에 있는 2.3㎞의 길로 금남로 1~5가로 이루어져 있다. 이중 금남로 1가의 옛 전남도청에서 옛 광주 은행 사거리 518m는 5·18광주민주화운동 등 한국 현대사의 역사를 간직한 곳으로 2011년 8월 30일 광주시에 의하여 '유네스코 민주인권로'로 지정되었다. 금남로는 광주시민이 계엄군에 맞서 5·18민중항쟁 기간 중 연일 격렬하게 저항했던 항쟁의 거리다. 5월 18일 카톨릭센터 앞에서 최초의 학생 연좌시위가 있었으며 5월 19일부터 수많은 시민들이 끊임없이 모여들어 투쟁의지를 불태웠다. 5월 20일 저녁에는 택시를 중심으로 100대 이상의 각종 차량이 참가한 대규모 시위가 있었다. 21일 계엄군의 집단 발포 전까지 30여 만 광주시민이 매일 운집, 군사독재 저지와 민주화를 촉구했던 금남로는 5·18민중 항쟁을 상징하는 거리다. 이후에도 항쟁의 진실을 밝히려는 투쟁이 이 거리를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카톨릭센터에서는 민주화를 위한 시민 집회가 계속 열렸다. 지금도 광주에서 진행되는 행사나 집회, 축제 등은 모두 금남로를 거쳐 옛 전남도청(현 국립아시아문화전당)으로 향한다.
5.4Km 2024-02-27
광주광역시 광산구 송정로1번길 28
062-942-0060
광주아우라호텔은 신축건물이며, 비즈니스 호텔로서 쾌적한 환경과 합리적인 가격으로 깨끗하고 편안한 이용이 가능하다.
5.4Km 2023-04-25
광주광역시 광산구 송정로1번길 28
062-942-0060
광주 아우라호텔은 KTX송정역 바로 맞은 편에 위치한 비즈니스호텔이다. 고급스러운 분위기에 청결한 객실과 널찍한 욕실은 편안한 숙박을 돕는다. 10분 거리에 광주공항, 광주 제2순환도로가 있어 교통에 편리하다. 인근에 송정떡갈비특화거리, 1913송정옛시장, 송정5일장 등이 있어 여행을 즐기기 좋다.
5.4Km 2024-07-31
광주광역시 동구 천변우로 355 (수기동)
010-6544-4600
광주광역시 충장로 중심에 위치한 일번지 호텔 충장로점은 2022년 광주광역시 우수숙박업소로 선정된 모던한 비즈니스 호텔이다. 객실은 8가지 타입으로 구성되어 있고, 타입에 따라 PC, 스타일러, 안마의자, 욕조, 테라스가 구비되어 있다. 객실에서 넷플릭스와 디즈니, 티빙을 시청할 수 있다. 주차장이 넓어 주차가 편리하고, 볶음밥, 라면, 식빵, 샐러드, 음료 등 조식을 무료로 제공한다. 주변에 먹거리가 많고 주요 관광지로의 접근성이 좋다.
5.4Km 2024-10-31
광주광역시 북구 용봉로 77 (용봉동)
전남대학교 박물관은 국내외 역사학, 고고학, 미술사, 민속학, 인류학, 자연사 분야의 자료뿐만 아니라 향토 문화의 연구 자료도 수집·보존·전시하고 있다. 교직원, 학생 및 지역민에게 연구·교육 자료를 제공하기 위해 설립되었으며, 1957년 5월에 금호각(당시 전남대학교 도서관)에서 최상채 박사의 기증품인 서화, 도자기 등을 모태로 개관했다. 이후 2002년에 용봉문화관으로 확장 및 이전돼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상설 전시실과 다양한 주제의 전시를 추진하는 기획 전시실로 구성되어 있으며 다양한 문화 체험을 할 수 있는 학습장이 있다.
5.4Km 2023-10-31
광주광역시 광산구 용아로 460
경장각은 조선 인조 대 문신인 이신의(1551~1627)를 배향하는 재각이다. 재각은 무덤이나 사당옆에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지은 집을 말한다. 이신의를 배향하기 위하여 1754년 지어진 유애서원이 1868년 서원 폐지령으로 훼철되자 1901년 서적과 유물을 보관하기 위하여 금서재가 세워졌고, 이후 금서재를 철거하고 1919년에 경장각을 건립하였다. 2000년 경장각 후면에 단청 사우를 마련하여 이신의를 배향하게 되었다. 이 곳에는 이신의의 유물로 선조왕 친필병풍과 거문고가 보존되어 있다. 병풍은 인조가 그의 충절을 가상히하여 선조왕 친필을 하사한 것이며, 거문고는 석탄이 평소 애용하던 거문고이다. 의병장이자 학자인 석탄 이신의선생의 생애와 업적을 다양하게 살펴볼 수 있는 또 다른 유적지는 경기도 고양에는 위치한 도래울석탄공원, 이신의선생기념관이 있다. *석탄 이신의 이신의의 본관은 전의이며 자는 경칙이고 호는 석탄이다. 일찍이 어버이를 여의고 형으로부터 학문을 배웠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향군 300명을 거느리고 적과 싸운 공으로 사옹원직장에 올랐으며, 이어 사재감주부·공조좌랑·고부군수 등을 지냈다. 1617년(광해군 9) 이항복·정홍익·김덕함 등이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유폐하는 등 광해군의 폭정에 대해 극간하다가 유배되자, 이신의도 분연히 항소를 올렸다가 이듬 해회령으로 유배, 위리안치되었다. 그 해 가을 북로의 경보가 있어 변경 일대가 불안하자 흥양으로 유배지를 옮겼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풀려 나와 형조참의·광주목사를 역임하고, 1626년 판결사를 거쳐 이듬 해 형조참판에 올랐다. 이 해 정묘호란으로 왕을 호종해 강화로 가던 도중 병이 나 인천에 머물다가 수원마정리에서 죽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고양의 문봉서원과 괴산의 화암서원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정이다. 저서로는 『석탄집』이 있다.
5.4Km 2023-10-31
광주광역시 광산구 용아로 460
유애서원은 조선 중기의 문신 이신의(1551~1627)의 학덕과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지어졌으며, 삼문 양편에 배롱나무꽃이 흐드러지게 핀 아담한 공간이다. 1754년 이신의의 충절을 기려 호남 유림이 건립했다가 1868년 훼철됐다. 이어 1919년 경장각을 짓고 2000년 사우를 마련해 서원으로 성균관에 등록했다. 유애서원의 경장각에는 서적과 석탄금(거문고), 선조가 쓴 당 오언시를 목판에 새겨 찍은 여덟 폭 병풍(인조의 하사품) 등 유품을 보관했으며, 선무원종공신녹권을 비롯한 130여점의 고문서는 광주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석탄 이신의 이신의는 한성에서 태어나 고양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형조판서 이원손이며, 어머니는 정종의 현손이다. 일찍 어버이를 여의고 형으로부터 글을 배웠다. 도라산 숲속에 서실을 지어 공부하는데 물이 바위를 굽이쳐 흐르는 것을 보고 여울의 탄을 넣어 호를 석탄(石灘)이라 했다. 서경덕의 문하인 초당 허엽과 행촌 민순을 사사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석탄은 의병 300여명을 결집해 고양에서 창의했다. 고향을 지키려는 이 작은 부대는 왜적이 쳐들어오자 혁혁한 공을 세운다. 1596년 서얼 이몽학의 난이 일어나 고을 수령들이 줄줄이 도망해 여러 현이 함락됐다. 이 와중에 석탄은 천안군수 정호인과 8천의 군사를 거느리고 난을 평정하는데 큰 공을 세운다. 이어 괴산·임천 군수, 홍주·해주목사를 거쳐 광주목사를 역임하면서 목민관으로 이름을 날렸다. 1617년, 영창대군이 참살당한 이후 광해군은 인목대비를 폐하기 위해 문무백관의 의견을 듣는 수의를 진행했다. 이 자리에서 그 부당함을 지적하는 항론을 올린다. 이 일로 이듬해 2월 함경도 회령으로 유배를 간다. 1623년 광해군의 폭정에 서인 일파가 정변을 일으키니 인조반정이다. 석탄은 5년의 귀양을 마치고 형조참의로 조정에 복귀한다. 광주목사에 이어 형조참판에 오른다. 1627년 정묘호란때 석탄은 노구를 이끌고 인조 호종을 위해 강화도로 향했다가 병을 얻어 77세에 수원의 어느 여사에서 숨을 거두었다. 우국일념이라는 한 마디를 남겼다고 한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시호는 문정이다. 고양의 문봉서원, 괴산의 화암서원, 그리고 광주의 유애서원에 제향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