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Km 2024-09-25
서울특별시 성북구 흥천사길 29
흥천사는 1397년 조선왕조를 창건한 태조가 정릉에 묻힌 신덕왕후의 명복을 빌면서 부처님의 가피를 빌어 온 세상을 흥하게 하겠다는(新興天下) 원력으로 창건되었다. 북한산 서쪽 기슭의 정릉 입구에 있는 신흥사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계비 강씨의 능인 정릉의 조포사(제사에 쓰는 두부를 만드는 절)였다. 정릉이 이장되면서 몇번 옮겨지다가 정조 18년(1794년)부터 지금의 자리에 정착되었다.
14.7Km 2024-02-16
서울특별시 종로구 필운대로 27-4 (누하동)
02-736-7909
서울 공공한옥 ‘서촌라운지’는 서울시민뿐만 아니라, 한국을 방문하는 모든 세계인에게 열린 공간으로 우리 고유 주거문화(K-하우스, K-리빙)의 가치와 매력을 선사하는 특별한 공간이다. 전통과 현대와의 조화를 담은 한옥 디자인, 타 문화와의 융복합을 시도한 K-공예 등 관련 국내·외 서적도 구비되어 우리의 삶과 한옥에 담긴 지혜를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 서울한옥 라이프스타일을 오감으로 경험할 수 있는 ‘서촌라운지’에서 세계시민들이 만나고, 교류하며, 한 잔의 차를 곁들여 서울한옥의 새로운 일상을 음미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14.7Km 2024-10-17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봉원사길 120
신라 제 51대 진성여왕 3년(889년) 도선국사가 현 연세대 터에 창건하고, 반야사라 하였다.제21대 영조 24년(1748년) 찬즙, 중암 두 스님에 의해 지금의 터전으로 이전하였고,영조는 친필로 봉원사라 현액하였으며, 신도들 사이에는 이 때부터 새로 지은 절이라 하여 "새절"이라 부르게 되었다. 제26대 고종 21년(1884년) 발생한 갑신정변의 주축을 이룬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 개화파 인사의 정신적 지도자였던 이동인 스님이 5년간 주석하였던 갑신정변의 요람지이기도 했다. 1911년 주지 보담스님의 중수와 사지의 확보로 가람의 면모를 새롭게 하였다. 1945년 주지 기월스님, 화주 운파스님과 대종의 원력으로 광복기념관을 건립하였다. 1950년 9월 28일 서울 수복 당시 병화로 광복기념관이 소진되었고, 이때 영조의 친필 현판 등 사보와 이동인스님 및 개화파인사들의 유물이 함께 소실되었다. 1966년 주지 영월스님, 화주 운파스님과 대중의 원력으로 소실된 염불당을 중건하였는데 이 건물은 대원군의 별처였던 공덕동 아소정을 옮긴 것이다.현재 봉원사는 한국불교의 전통 종단인 태고종의 총본산으로서 전법수행의 맥을 이어가고 있는 바 대중은 60여 스님, 신도는 10만을 헤아리며 박송암 스님(2000년 2월 입적), 이만봉스님이 주석하며 후학을 지도하고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옥천범음대학이 있고, 신행단체로는 관음회, 화엄법회, 청년회, 학생회, 어린이 인경회 등 법회가 개최되고 있으며 대외적으로도 교도소, 소년원, 양로원, 고아원,군부대 등을 정기적으로 방문하여 교화활동을 펼치고 있어 태고종 총 본산으로서 그 소임을 다하고 있다. 봉원사에서는 대한민국 국가무형문화재인 영산재 보존회 주최로 세계평화 및 남북통일을 기원하기 위하여 영산재를 봉행하고 있다.영산재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하시는 도량을 시공을 초월하여 본 도량으로 오롯이 옮기고 영산회상의 제불보살님께 공양을 올리는 의식이다. 그리하여 살아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이 다 함께 진리를 깨달아 이고득락의 경지에 이르게 하는 의의가 있다. 그러므로 영산재는 공연이 아닌 장엄한 불교의식임을 인식해야 한다. 즉, 삶과 죽음으로 갈라진 우리 모두가 불법 가운데 하나가 되어 다시 만날 것을 기원하며, 부처님 전(前)에 행하는 최대 최고의 장엄한 불교 의식이다.
14.7Km 2024-10-02
서울특별시 노원구 동일로217가길 39
02-938-5142
고바우소곱창은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평범한 동네 식당이지만 서민들의 모습을 진솔하게 담고 있는 식당이다. 동그란 원통형 테이블과 마루 위의 테이블 6개가 소박하지만 깨끗하게 잘 정돈되어 있다. 이 집의 주요 메뉴는 소 곱창이다. 불판 위에서 자글자글 노르스름하게 잘 익은 곱창은 그 맛이 고소하고 씹히는 맛이 쫀득쫀득하다. 곱창을 다 먹고 나서 밥을 볶아 먹으면 그 맛이 별미이다. 그 외에도 갈빗살, 안창살 등의 고기도 맛이 좋으며 노원역 6번 출구 국민은행 뒤편에 자리하고 있다.
14.7Km 2023-09-07
서울특별시 종로구 자하문로7길 28-3
02-473-9680
서울 종로 서촌에 위치한 서촌게스트하우스는 90년 된 한옥이자 2층 양옥이 함께 어우러진 집이다. 여행객은 1층 객실과 대청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고, 식사로 6첩 반상을 제공한다. 게스트하우스 부제 ‘재미난골’ 에서는 우리 전통의 멋을 알리기 위해 일년에 두 번 마당에서 판소리 공연을 펼치고, 국악 체험, 한복입기, 한식 만들기, 인왕산-북악산 성곽길 탐방, 경복궁 등 고궁투어, 전통시장 체험 등 다양한 프로그램도 제공하고 있다.
14.7Km 2024-08-19
서울특별시 종로구 북촌로 94-14 (가회동)
010-2882-1090
서울 북촌에 자리한 선음재는 1934년에 지어진 한옥을 리모델링하여 제26회 서울시 건축상을 수상한 한옥이다. 호스트가 거주하다가 최근 재오픈하였다. 선음재는 4개의 침실, 안채대청, TV룸과 다락방, 앞마당의 누마루, 사랑채 대청과 누마루, 그리고 후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모든 공간은 황토와 한지 벽지로 되어 있고, 편안한 숙면을 위해 템퍼 침대와 토퍼를 제공한다. 와룡공원 전망대에서 서울 야경을 보거나 서울 성곽을 따라 저녁 산책을 해보기를 추천한다.
14.7Km 2024-09-13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통일로 251
서대문형무소는 대한제국 말에 일제의 강압으로 감옥이 지어져 80여 년 동안 우리 근·현대사 격동기의 수난과 민족의 한이 서려있는 역사의 현장이자 우리 민족의 항일 독립운동에 대한 일본 제국주의의 대표적인 탄압기관이었다. 1908년 10월 21일에 경성감옥이란 이름으로 문을 연 뒤 일제에게 우리의 국권이 빼앗기자 이에 항거하는 민족독립운동이 전국에서 거세게 일어나고 일제는 수많은 우리의 애국지사들을 체포 투옥시켰다. 수용인원이 증가하자 그들은 마포 공덕동에 또 다른 감옥을 지었고, 이 때문에 1912년 9월 3일에 서대문감옥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름의 변화만큼이나 많은 민족수난의 역사를 간직한 채 1992년 8월 15일에 현재의 ‘서대문독립공원’으로 개원하였다. 현재는 역사성과 보존가치를 생각해 7개 동만을 원형대로 보존하고, 그중에서 옥사 3개 동과 사형장은 사적 제324호로 지정되었다. 서대문구에서는 1995년부터 서대문독립공원 사적지에 대한 성역화사업을 시작하였다. 조국 독립을 위해 일제의 침략에 맞서 싸우다 투옥되어 모진 고문과 탄압을 받고 순국하신 애국선열들의 넋을 기리고, 후손들에게 우리 선열들의 자주독립 정신을 일깨워 주는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삼기 위해 새롭게 단장하여 1998년 11월 5일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개관하였다.
14.7Km 2024-01-17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희로 135
연희초등학교에서 육교를 건너 바로 앞에 있다. 다양한 종류의 커피를 즐길 수 있다. 커피 말고도 차, 에이드, 칵테일 등 메뉴가 다양하다. 조명을 거의 켜놓지 않아 전체적으로 내부가 어둡다. 큰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에 의존해 다녀야 한다. 독특한 모양의 벤치와 긴 테이블 등이 놓인 실내는 심플한 콘셉트 디자인의 극치라 할 수 있다. 2층 건물을 사용해 매장에 자리가 많다. 주차 공간이 넓은 편이다. 버스정류장도 가까워 접근성이 좋다. 근처에 신촌 대학가가 있어 방문하기 좋다.
※ 반려동물 동반 가능
14.7Km 2024-09-20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방우산장은 조지훈 기념 건축 조형물이다. 방우산장은 성북동에서 활동하던 시인 조지훈이 자신이 살던 집에 붙인 이름으로 [마음속에 소 한 마리를 키우면 직접 소를 키우지 않아도 소를 키우는 것과 다름없다]는 [방우즉목우]의 사상을 담은 것이라고 한다. 이 조형물은 시인 조지훈의 집터 근처에 [시인의 방]이라는 콘셉트으로 조성된 것으로, 조지훈 시인의 삶과 흔적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이다. 전통 한옥의 처마와 마루를 모티브로 삼아 벽과 바닥을 만들었다. 현무암을 써서 독특한 느낌을 풍기며, 열린 공간에는 잔디를 깔고 청동주물로 만든 의자를 들여놨다. 의자는 정해진 방향 없이 자유롭게 배치하였다. 그리고 시인의 집터 방향으로 문을 내고 바깥벽에는 시인이 가장 아끼던 작품 [낙화]가 새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