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정낚시터 - 주변 여행 및 근처 관광 명소 - 국내 여행 정보

한국관광공사에서 제공하는 공공데이터를 활용하여 독정낚시터 - 주변 여행 및 근처 관광 명소 정보를 소개합니다.

독정낚시터

독정낚시터

1.1Km    2024-05-14

경기도 안성시 원곡면 원당로 108

경기 안성시 원곡면 독정저수지에 위치한 낚시터이다. 독정저수지는 수 면적 약 36,000 m2, 수심 3~6m의 평지형 저수지이다. 개인 좌대, 수상좌재, 연안좌대, 잔교 좌대와 방갈로가 있다. 방갈로에는 TV, 에어컨, 온돌, 침구류 등이 있다. 주 어종은 붕어이다. 새우나 지렁이, 땅강아지 등 생미끼를 사용하면 메기와 장어를 낚을 확률이 높아진다. 가까이에 칠곡저수지, 반제낚시터, 고삼 호수가 있다. 평택 제천 간 고속도로 서안성 IC에서 차로 5분 거리다.

최규서어서각

최규서어서각

1.2Km    2025-03-25

경기도 안성시 원곡면 만리길 35

조선 중기의 명신[名臣]으로 영의정을 지낸 충정공[忠正公] 최규서[崔奎瑞 1650-1735]선생에 내린 영조의 어서[御書]와 영정[影幀]을 모신 정각[旌閣]이다. 영조는 충정공의 공로를 높이 찬양하여 친필로 쓴 일사부정[一絲扶鼎]이란 어서를 하사하고 충신정문[忠臣旌門]을 세우게 했다. 그러나 정각이 선 자리에 1915년 미국 대사관이 들어서게 되어 부득이 어서를 공의 묘소가 있는 지금의 이곳으로 옮겨 모신 것이다.

황제능이버섯백숙

황제능이버섯백숙

1.6Km    2024-05-02

경기도 안성시 원당로 143

황제능이버섯백숙은 경기도 안성시 원곡면 칠곡리에 있는 백숙 전문점이다. 추천 메뉴는 황제 능이 해신탕과 능이 전복/오리(닭)백숙이다. 황제 능이 해신탕은 오리나 닭백숙, 문어, 전복, 찰밥이 나오며 능이 전복/오리(닭)백숙은 백숙, 전복, 대하, 찰밥이 나온다. 이 외에도 능이 낙지/오리(닭)백숙, 능이 오리(닭) 백숙, 능이 전복삼계탕, 능이 삼계탕을 판매하고 있다. 평일 14시 전에는 능이 곰탕과 능이 칼국수를 판매한다.

모스트417

모스트417

1.6Km    2024-08-05

경기도 안성시 원곡면 만세로 959-3

경기도 안성시 원곡면에 있는 에펠탑과 야외 수영장이 있는 사진 찍기 좋은 카페이다. 야외 수영장은 오로지 사진 찍기를 위한 장소로만 사용한다. 야외의 에펠탑 위로 파란 하늘과 흰 구름을 배경으로 의자에 앉아 사진을 찍으면 예쁜 사진이 나온다. 사진 촬영만을 위한 수영장 안에 사각의 징검다리를 거닐며 찍은 사진은 SNS용으로 제격이다. 약 3,800㎡의 규모로 주차 공간이 여유롭다. 서안성 IC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있다.

하루

하루

1.9Km    2024-12-10

경기도 안성시 대소길 16

하루는 경기도 안성시 원곡면 외가천리에 있는 일식당이다. 메밀 소바, 우동, 카레라이스, 돈가스, 사이드메뉴 등을 판매하고 있다. 영유아 제외하고 1인 1 메뉴 주문해야 한다. 대표 메뉴인 냉모밀은 살얼음이 띄워진 시원한 육수에 메밀면이 담가져 나온다. 밑반찬인 김치와 깍두기는 직접 담근 것이다. 매장 내부는 우드톤 인테리어로 쾌적하고 깔끔하다. 입식 테이블 좌석으로 되어있다. 매장 앞에 약 5대 정도 주차할 수 있는 주차 공간이 있다. 식당 근처에 전용 주차장이 따로 마련되어 있어 편하게 이용할 수 있다.

운수암

운수암

2.0Km    2024-06-17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성하길 80-63

운수암은 안성 고성산 무양 산성 안의 중앙 고지에 자리 잡고 있다. 조선시대인 1750년(영조 26)에 장씨 부인이 창건하였다고 한다. 과부였던 장씨 부인이 부처를 모시려고 무양 산성 밖에 터를 닦았는데, 꿈에 노승이 나타나 성안에 절을 지으라고 말하였다. 그 자리에 가서 쓰러진 풀과 나무를 치우고 보니 절터로 적합하여 이 암자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1870년(고종 7)에 대원군이 시주하여 중건되었고 운수암이라고 쓴 친필 현판을 하사하였으며, 1986년에는 대웅전이 중건되었다. 현재 암자의 중앙 높은 터 위에 대웅전이 있고 그 옆에는 비로전이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요사채는 비로전의 주축과 직교되게 위치하고 있다. 돌보는 사람이 없어 무너지기 직전인 것을 현암 스님이 보수하고 대웅전을 불사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방산리 입구에서 서북쪽을 향해가면 낙엽송과 송림 사이로 운수암의 정취가 눈에 잡히며, 청아한 목탁소리가 숲길에 먼저 배웅 나오는 운수암은 경기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어 있으며, 고려 시대 조성한 비로자나 불좌상이 있다.

무양산성(무한성)

무양산성(무한성)

2.1Km    2024-08-27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방신리

무양산성은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방신리 고성산의 남서쪽 봉우리에 축조된 둥근 모양의 산성이다. 해발 207.5m의 산 정상부와 8부 능선을 이용하여 산 정상부를 중심으로 성벽을 둘러서 쌓은 내성과 동남쪽으로 뻗어 내린 계곡 부를 포함하여 산봉우리를 중심으로 주변 계곡 일대를 돌아가며 성벽을 쌓은 외성으로 이루어진 복합 방식의 산성이다. 전체 둘레는 내성이 680m, 외성 구간이 400m이며 긴 타원형 모양이다. 외성은 내성의 일부 구간을 포함하여 북동쪽으로 확대한 모습이다. 산성의 시설물로는 문지, 치성, 건물지, 우물지 등이 발굴되었으며 유적이 위치한 곳은 하천 교통로와 삼남지방으로 이어지는 육로가 발달한 요충지로 고대 사복흘 및 적성현의 치소(어떤 지역의 행정 사무를 맡아보는 기관이 있는 곳)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추측은 산성 안에 있는 운수암과 그 주변에 대한 시굴조사에서 삼국시대 및 통일신라시대의 기와 및 토기류가 집중적으로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운수암 입구가 내성의 문지로 추정되며 지금은 진입로 좌측으로 산책길이 조성되어 있어 주변을 산책하고 둘러보기 좋다.

동물 좋아하는 아이는 다 모여라!

동물 좋아하는 아이는 다 모여라!

2.1Km    2023-08-08

이 성은 산정 고원지에 둥글게 쌓은 석성으로서 이러한 산성은 고대에 많이 축성해 온 형태이다.이 성은 일명「무한성」이라고 현지에서 불려오기도 하는데「신증동국여지승람」한성현 고적조 및 성지조에는 분명히「무양성:현」남쪽 12리 지점에 있는데, 석축이다.

만세고개

만세고개

2.2Km    2024-06-20

경기도 안성시 만세로 891

만세고개는 경기도 안성시 원곡면과 양성면 사이의 고개이다. 1919년 4월 1일 원곡면 주민들이 만세 시위를 벌인 곳이다. 원래의 이름은 성은고개 또는 양성고개이다. 3.1 독립운동이 한창이던 1919년 4월 1일 밤 원곡면민 1,000여명이 만세고개에 이르러 태극기를 들고 독립 만세를 외치며 결의한 뒤 양성으로 돌진하였다. 양성 주민 1,000여 명과 합류하여 일본의 기관들을 불태우고 이 지역을 2일간 해방시켰다. 독립항쟁 운동을 기리기 위해 만세고개로 불리고 있다. 또한, 2001년 이곳에 안성 3.1운동 기념관이 세워졌다. 기념관 뒤로 백련봉으로 오르는 등산로가 있다. 창진산장휴게소가 있다. 안성 3.1운동 기념관 주차장과 창진산장휴게소 주차장을 이용할 수 있다.

경앙사

2.3Km    2024-10-31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덕봉리

경앙사는 오진영 선생의 문인들이 조선 후기 대표적인 성리학자인 노주 오희상을 비롯해 간재 전우, 석농 오진영 선생의 학덕과 절개를 기리기 위해 위패를 봉안하고 제향을 올리는 사당이다. 매년 음력 3월 10일 제사를 지내고 있다. 건물의 총 26㎡(8평)로 겹처마 맞배지붕의 한옥이며 홍살문, 삼문, 사당 등이 차례로 배치되어 있다. 특히 현판 액자는 석농의 제자인 월헌 이보림 선생이 썼다고 전해지는데 여기서 경앙은 [高山仰止 景行行止] 즉, 산은 사람을 우러러보고 길은 사람이 많이 다니므로 천하만인에게 존경받는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오희상 선생은 일찍부터 학문에 힘써 성리학의 일가를 이루었고, 정조 24년(1800) 세자익위사 세마가 된 후 여러 차례 벼슬을 하다가 사직하고 광주 징악산에 은거하면서 성리학 연구에 힘썼으며 사망 후엔 헌종 7년(1841)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전우 선생은 경전을 깊이 연구해 당대 최고의 학자라는 평을 들었으며 을사늑약 때 을사오적의 참형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이를 전하지도 못하자, 다음을 기약하며 후진 양성에 힘을 썼다. 의병운동과 3·1운동 등 항일운동이 거셌던 시기라 이를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개의치 않고 계화도에서 수많은 제자를 가르치고 60여 권의 저서를 남겼다. 오진영 선생은 전우 선생의 제자로 을사늑약에 분개하여 각국의 공관과 정부에 부당함을 알리는 글을 보냈으며, 이수홍과 파리 만국회의에 보낼 공문을 작성하였으나 전달에 실패했다. 1938년 화양동 만동묘 철거를 반대하고 추담별집을 간행, 배포했다. 흰옷과 검은 갓으로 끝까지 항일의 뜻을 굽히지 않았고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 힘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