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계장 (3, 8일) - 주변 여행 및 근처 관광 명소 - 국내 여행 정보

한국관광공사에서 제공하는 공공데이터를 활용하여 장계장 (3, 8일) - 주변 여행 및 근처 관광 명소 정보를 소개합니다.

장계장 (3, 8일)

장계장 (3, 8일)

0m    12337     2023-09-19

전라북도 장수군 시장천변길 36 장계재래시장장옥A블럭
063-352-0346

군산 대구선과 남해 원주선(구도 26번, 19번)이 교차되는 교통의 요충지이며 경상남도와 전라북도가 인접된 지역으로 20년 전만 해도 장계 장날이면 인근 경상남도 함양, 서상과 전라북도 무주, 안성, 진안, 남원, 금산, 전주 등 각지에서 모여들어 성시를 이루었다. 현재는 상권 형성이 지역별로 활성화되면서부터 진안, 안성 일부와 지역민들만 이용하므로 규모가 작아졌다고 하나 우시장만은 성시를 이루고 있다. 3대째 운영하고 있는 전통적인 옛 대장간은 장계 시장의 명소이다.

타짜 장면

타짜 장면

153.27795577115018m    1     2022-08-25

전라북도 장수군 장무로 195

영화 타짜의 한 장면이 떠오를 것 같은 상호처럼 간판에 화투패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 집의 대표 메뉴인 차돌 짬뽕은 푸짐한 양과 얼큰한 국물이 매력적이다. 각종 채소와 차돌이 어우러진 국물의 맛은 진하면서도 개운한 불맛을 느낄 수 있어 해장 메뉴로도 인기가 많다. 특히 차돌 짬뽕은 양도 푸짐하여 배를 든든하게 채울 수 있다. 탕수육도 빼놓을 수 없는 메뉴 중 하나로 튀김이 바삭하면서도 부드러워, 식사와 함께 미니 탕수육을 주문하는 손님들이 많다. 장수논개생가마을이 근처에 있어, 식전, 후 들러보는 것도 좋다. 

대갓집

370.88095696208217m    12325     2023-01-20

전라북도 장수군 장계면 한들로 123
063-353-7777

정갈하고 나물마다 맛이 살아있는 산채비빔밥은 건강식으로 추천 메뉴이다. 오리요리 또한 보양식으로 많은 분들이 찾는 메뉴이다. 오리고기는 육류 중 알카리성 식품으로 유명하다. 불포화 지방산이 높고 유해 콜레스테롤의 생성을 억제하는 리놀산이란 물질을 포함하고 있어 각종 성인병과 혈관계질환에 도움이 된다고 알려져 있다.

서울숯불갈비

서울숯불갈비

556.4096072214005m    19827     2023-05-19

전라북도 장수군 장계면 문화로 40
063-352-2933

서울숯불갈비는 깻잎으로 잡내를 없앤 돼지갈비가 유명한 식당이다. 기본 반찬 중에는 쌉싸름한 고수 나물이 특이한데, 고기와 싸먹거나 된장을 찍어 먹어도 맛이 좋다. 눈에 띄는 관광지가 보이지는 않지만 특색 있는 고기를 맛볼 수 있는 곳이다.

월강사

1.3 Km    20252     2022-09-16

전라북도 장수군 장계면 도장골길 37-8

이 사원은 월강리 도장골마을 입구에서 서쪽으로 있는 나즈막한 야산의 남서쪽 사면에 있다. 월강사는 조선조 순조 28년(1828) 창건되었으며, 고종 5년(1868) 대원군의 전국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광복 후, 1948년 복설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솟을대문으로 된 회충문을 들어서면 월강사묘정비가 있으며 정면에는 정면 4칸, 측면 2칸 팔작지붕으로 된 모현재가 있다. 이모현재 뒤에 경사진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정면 3칸, 측면 2칸 맞배지붕으로 된 월강사가 있다. 월강사에는 충숙공 정신재 백장, 퇴휴재 송보산, 손재 김남 택, 충의공 일휴당 최경회, 퇴거재 김남중, 삼락당 송수산, 경재 백여옥 등 일 곱 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도암서원

1.3 Km    15200     2022-08-17

전라북도 장수군 장계면 서변길 49-27

1815년(순조 15) 지방유림의 공의로 이경광(李絅光)·이성구(李聖求)·유심춘(柳尋春)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사우(祠宇)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그 뒤 1983년 유림에 의하여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사우(祠宇)와 4칸의 강당이 있으며, 사우에는 이경광·이성구·유심춘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강당의 중앙에는 마루가 있고 양쪽에는 협실이 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의 토론장소로 사용된다. 이 서원에서는 해마다 3월 5일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제품(祭品)은 4변(籩) 4두(豆)이다. 재산으로는 대지 1,200여 평이 있다.

월강서원

월강서원

1.3 Km    1477     2022-08-26

전라북도 장수군 장계면 도장골길 37-8

1826년(순조 26)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백장(白莊)·송보산(宋寶山)·김남택(金南澤)·최경회(崔慶會)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 위패를 모셨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나, 유림과 후손에 의하여 제단을 마련하고 춘추로 향사를 지내오다가 그 뒤 1948년에 복원하였다. 1974년에는 백여옥(白如玉)·김남중(金南重)·송수산(宋壽山)을 추가 배향하였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사우(祠宇), 4칸의 강당, 고사(雇舍)·행랑·대문 등이 있다. 사우에는 백장을 주벽(主壁)으로 하여 좌우에 송보산·백여옥·김남중·최경회·김남택·송수산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된 강당은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의 토론장소로 사용된다. 행랑은 공부하는 유생이 거처하는 곳으로 사용하며, 고사는 관리자가 거처하는 곳이다. 이 서원에서는 매년 3월과 9월 15일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제품(祭品)은 4변(籩) 4두(豆)이다. 유물로는 『사선생사실록(四先生事實錄)』1책 등 40여 권의 문헌이 있으며, 재산으로는 전답 1,500여 평과 임야 700여 평이 있다.

자락정

1.4 Km    20635     2022-07-13

전라북도 장수군 장계면 삼봉리

자락정은 조선시대 사인(舍人) 김영호(金永浩), 감사(監司) 박수기(朴秀基) 등이 창건하였으나, 퇴폐되어 1924년 양가문의 후예가 중건하였다. 주위의 경관은 정자로 하여금 더욱 경계를 아름답게 하는데 풍천의 맑은 물과 섬과 같이 치솟은 석벽에 정자가 조화되어 가히 제일경으로 손꼽히고 있다.

김남택신도비

2.2 Km    14949     2022-12-29

전라북도 장수군 계남면 원호덕길 79

* 성격이 준엄하여 위언으로 항소하기를 좋아 하여 *

신도비란 임금이나 고관의 평생업적을 기록하여 무덤가에 세워두는 것으로, 이 비는 조선 전기의 문신인 김남택의 공적을 기리고 있다. 김남택(金南澤)은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호는 손재, 성수이며, 본관은 함창이다. 고려말 공민왕 19년(1370) 현 계남면 침령마을에서 태중대부 원비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목은 이색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공부하였으며, 성격이 준엄하여 위언으로 항소하기를 좋아 하였다.

* 유학 진흥을 위해 진력 *

그는 조선조에 들어와 세종 조에 예조판서를 역임하다 만년에는 동생 형조판서 김남중과 함께 경상남도 하동에서, 다시 전라북도 장수 화산 북쪽 침령 아래로 퇴거하여 유학 진흥을 위해 진력하며 여생을 보내다 세종 18년(1436) 죽었다. 방촌 황희의 찬에 “군자가 천의를 체득하고 철인은 사기를 살폈도다! 만약 시우의 윤택이 있다면 만물은 스스로 빛나리라”라고 하였다. 1828년(순조 28) 지방유림의 공의로 월강서원을 창건하여 배향(配享)하였는데, 1868년(고종5) 훼철되었다가 1948년 복설되었다. 이 신도비는 최근에 이르러 후손들에 의해 세워진 것이다.

수열비

2.9 Km    14949     2022-12-26

전라북도 장수군 계남면 화음리

* 오씨 부인이라는 여인의 절개를 기리는 비 *

1984년 전라북도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조선시대 장수지방 화평마을에 살았던 양사무(梁思無)의 부인 해주오씨를 기리는 석비이다. 수열평 마을에 자리하고 있는 비로, 조선시대 중기의 오씨 부인이라는 여인의 절개를 기리고 있다.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 장수지방에 침입하였던 왜적들이 집집마다 약탈을 하며 불을 지르기도 하면서 부녀자들을 겁탈하는 일이 잦았다. 화평 마을에 살고 있는 양사무의 부인 오씨부인은 아침에 들이닥친 왜적들에게 가슴을 잡히는 등 모욕을 당하게 되자, 자신의 가슴을 칼로 베어 그들의 얼굴에 뿌리면서 “짐승만도 못한 오랑캐들아! 젖이 욕심나거든 이것을 들고 네 나라로 돌아가라”며 크게 외쳤다. 부인의 위엄에 눌린 왜적들은 곧 달아나고, 피를 많이 흘린 부인은 그 자리에 쓰러져 운명하였다. 훗날 이러한 사연을 나라에 올려 아뢰니, 조정에서는 부인을 위한 비를 세우도록 명하였다.

* 선조의 손자인 낭선군 우의 글씨 *

비각안에 서 있는 비는 낮은 사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운 구조로, 비몸의 윗변이 둥글게 다듬어져 있다. 앞면에는 비의 이름을 길게 새기고, 뒷면에는 ‘수열평(樹烈坪)’이라 썼는데, 이때부터 화평이라는 마을 이름도 수열평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비문은 선조의 손자인 낭선군 우의 글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