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장진우식당 - 주변 여행 및 근처 관광 명소 - 국내 여행 정보

한국관광공사에서 제공하는 공공데이터를 활용하여 원주장진우식당 - 주변 여행 및 근처 관광 명소 정보를 소개합니다.

원주장진우식당

원주장진우식당

10.2Km    2023-07-02

강원특별자치도 원주시 감영길 28

원주 장진우식당은 강원도 원주시 원주 감영 근처에 있는 레스토랑이다. 비뇨기과였던 건물을 리모델링해서 식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식당 앞 벤치엔 아직도 제약회사 광고가 남아 있다. 실내는 근대 경양식집처럼 레트로풍으로 꾸며놓았다. 샐러드, 파스타, 스테이크 등 다양한 요리가 준비되어 있으며 세트 메뉴를 즐길 수도 있다. 음식을 서빙하면서 예의 바르게 음식에 관해 설명해준다. 데이트 장소로 혹은 특별한 날을 기념하기 위해 찾는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이다. 전용 주차장을 갖추고 있지 않아 주변 유료 주차장에 주차해야 한다. 레스토랑 방문객에게 1시간 무료 주차권을 제공한다.

나이키 원주타운

나이키 원주타운

10.2Km    2024-04-23

강원특별자치도 원주시 원일로 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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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서진_아디다스(원주)

(주)서진_아디다스(원주)

10.2Km    2024-06-22

강원특별자치도 원주시 원일로 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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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조선식산은행 원주지점

구 조선식산은행 원주지점

10.2Km    2024-10-07

강원특별자치도 원주시 중앙로 88 (중앙동)

구 조선식산은행 원주지점은 일제강점기 일제의 경제적 침략에 큰 역할을 한 조선식산은행 원주지점으로, 원주 지역에서 맨 처음 건립된 은행이다. 조선식산은행은 1906년 6월부터 각 지방에서 설립된 6개 농공은행 권리와 의무를 계승한 은행으로서, 조선총독부가 조선에서 농업생산을 극대화하기 위해 일본인의 직접적인 투자와 경영에 의존하는 대형 개발은행으로 설립했다. 1943년에는 한국인 행원 150명을 포함하여 498명의 행원을 채용했던 조선총독부 산하 최대의 정책금융기관으로 계속 활동하였다. 그러나 8·15 해방과 함께 일본으로부터의 자본도입이 소멸되고, 극심한 인플레이션으로 사채 소화도 불가능해 미국 대충자금의 일부만 취급하는 등 개발은행 업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채 상업은행으로 변신하여 활동하다가 1954년 제정된 한국산업은행법에 의거해 개발은행인 한국산업은행으로 재출범했다. 외관은 전체적으로 좌우 대칭을 이루며 창문을 위아래로 길게 반복 배치하여 수직성을 강조하였고, 외벽은 인조석 질감의 모르타르로 마감하는 등 일제강점기 은행 건축물의 특징을 잘 보여 준다.

패브릭그레이

패브릭그레이

10.3Km    2024-06-21

강원특별자치도 원주시 중앙로 87 (중앙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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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악예술관

치악예술관

10.3Km    2023-07-01

강원특별자치도 원주시 서원대로 331 치악예술관

치악예술관은 원주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 된 대형공연장으로 각종 공연, 행사, 전시 등을 진행한다. 600석의 객석과 다양한 분장실, 조명시설, 음향시설, 영사시설 등을 지역주민을 비롯한 문화예술인, 문화예술단체에게 제공하고있다.

원주 강원감영

원주 강원감영

10.3Km    2024-05-13

강원특별자치도 원주시 원일로 85

강원특별자치도 원주시 원일로에 위치한 강원감영은 조선시대 강원도 관찰사가 직무를 보던 관청이다. 강원감영은 조선시대 강원도의 26개 부·목·군·현을 담당하던 강원도 지방 행정의 중심지로 1395년(태조 4)에 설치되어 1895년(고종 32) 8도제가 폐지되고 23부제가 시행됨에 따라 기능을 상실하였다. 감영이 폐지될 때까지 500년 동안 강원도의 정청 업무를 수행했던 것으로 남다른 의미가 있는 곳이다. 1895년 이후 대부분의 건물들이 없어지고 선화당을 비롯하여 포정루, 내아 등 몇 동의 건물만 남게 되었으나 감영의 중심 건물인 선화당이 남아있는 곳은 전국에서 원주가 유일하다. 1896년 이후 강원감영 건물은 원주 진위대 본부로 사용하였고, 1907년 진위대가 해산된 후에는 원주군청으로 사용되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으로 많은 건물이 소실되었으나, 2000년부터 강원특별자치도와 원주시에서 복원작업을 추진, 시작하여 2005년까지 일부를 복원하고 이후, 2011년 10월 선화당 뒤편에 자리 잡고 있던 원주 우체국 청사를 철거하고 후원 권역 복원에 착수하여 2018년에 복원 완료하였다. 복원이 완료된 선화당 후원은 아름다운 연못과 함께 봉래각, 채약오, 조오정, 관풍각 등의 정자, 건물들과 600년 수령의 보호수인 느티나무, 원주 출신의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여성 시인인 〔김금원의 여행일기〕 조형물도 볼 수 있게 되었다. 원주 강원감영은 전국의 감영 중에서 형태가 가장 잘 복원되어 있기로 유명하다. 복원 이후에는 매년 9월경 밤 10시까지 시민에게 개방되는 ‘달빛여행’이라는 지역 축제를 개최하여 아름다운 야경 명소로도 사랑받고 있다.

원주 시내탐방 코스

원주 시내탐방 코스

10.3Km    2023-08-08

원주시는 치악산 국립공원을 비롯하여 도도한 섬강의 위용과 국난을 슬기롭게 극복하고 찬란한 문화유적 등을 고루 지닌 유서 깊은 고장이다. 이러한 유서 깊은 유적지를 하루 만에 만나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우선 박경리의 토지를 만날 수 있는 토지문학공원을 거쳐, 민긍호대장 묘역과 강원 감영지과 원주향교의 유적지를 만난다. 더불어 원주 역사박물관에서 원주의 민속역사와 오래된 고찰 국형사까지 돌아본다.

원주에서 만나는 역사와 문학의 향기

원주에서 만나는 역사와 문학의 향기

10.3Km    2023-08-10

원주는 500여 년동안 강원도의 정청 업무를 수행했던 감영이 있던 곳으로 지방행정의 중심지였고, 강릉과 원주를 합친 강원도의 이름에 들만큼 예로부터 큰 고장이었다. 또한 원주는 소설가 박경리 선생이 말년에 머물던 곳이다. 박경리선생의 옛집과 토지의 배경을 테마공원으로 조성해 꾸며놓은 곳이다. 원주는 원주의 역사와 문학여행을 즐길 수 있는 최적의 여행지다.

구룡사

구룡사

10.3Km    2024-10-17

강원특별자치도 원주시 소초면 구룡사로 500

신라 문무왕 8년(668)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사찰로 대웅전 자리에 9마리의 용이 살고 있는 연못을 메우고 사찰을 창건하여 구룡사(九龍寺)라 하였으나, 조선 중기에 거북바위 설화와 관련하여 현재의 명칭인 구룡사(龜龍寺)로 개칭하였다고 전해진다. 또한 『치악산구룡사사적』에 따르면 신라말의 고승 도선국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현재는 강희45년 글자가 새겨진 와당이 출토되어 숙종 32년(1706)에 구룡사가 중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대웅전 앞 좌우에는 서상원과 보광루, 적묵당, 심검당의 승사가 있으며 이밖에도 원통문, 국사단, 사천왕문, 범종각, 응진전 등이 있다. 절 입구에는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부도군이 있고, 또 구룡사의 전설을 말해주는 거북바위와 폭포아래에 용소가 있다. 또한 조선시대에 만든 황장금표가 있는데 이것은 치악산 일대의 송림에 대한 무단벌채를 금하는 표식이다.

* 구룡사 이름 속 숨어있는 전설 *
의상과 아홉용에 얽힌 전설이 전해온다. 원래 대웅전 자리에는 연못이 있었다. 그 곳에는 아홉 마리 용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의상은 치악산을 향해 가던 중 사방을 살펴보니 동쪽으로는 주봉인 비로봉이 솟아 있고, 다시 천지봉의 낙맥이 앞을 가로질은 데다가 계곡의 경치 또한 아름다워 이곳은 절을 세울만한 곳이라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연못을 메워 절을 지으려고 용들과 도술시합을 했다. 용들이 먼저 솟구쳐 올랐다. 그러자 뇌성벽력이 치고 산들이 모두 물에 잠겨버렸다. 용들이 흐뭇해하며 주변을 살피니, 의상은 비로봉과 천지봉에 줄을 걸어 배를 매놓고 그 안에서 자고 있었다. 다음은 의상이 움직였다. 부적을 한 장 그려 연못에 넣었다. 그러자 연못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고 용들이 뜨거워 날뛰었다. 그때 놀란 용 여덟 마리가 절 앞산을 여덟조각 내면서 동해로 도망치고, 한 마리는 눈이 멀어 함께 도망가지 못하고 못에 머물렀다. 그래서 절 이름도 구룡사(九龍寺)라 했고 한다. 세월이 흘러 절이 퇴락하게 되었고, 어느 날 한 노인이 나타나 절 입구의 거북바위 때문에 절의 기가 약해졌으니 그 혈을 끊으라 했다. 그대로 했더니 절이 더 힘들어졌고 폐사가 되려 했다. 이번에는 한 도승이 나타나 훈수를 했다. 거북의 혈맥을 끊어서 절이 쇠락해졌으니 다시 그 혈맥을 이으라는 것이다. 그래서 절 이름을 구룡사(龜龍寺)로 바꾸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