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5-31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화서로 973
조형스튜디오는 산촌생태마을 체험관 숲속 학교 아래 계곡에 걸쳐 있는 작은 다리 하나를 건너면 바로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다. 하얀색의 외관과 잔디밭이 멀리서도 눈에 띄는 조형스튜디오는 입구부터 눈을 즐겁게 한다. 마당 가득 작가의 테라코타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흙공예작가 김명희 선생의 작업 공간이자 전시공간인 김명희 조형 스튜디오이다. 김명희 선생은 중국 민간 공예 특급 대사 ‘위청청’ 선생에게 사사한 한국 유일의 제자로 흙공예 특히 흙으로 인형을 만드는 분야에서는 국내외에서 명성이 자자하다.
2023-07-03
강원특별자치도 평창군 진부면 오대산로 374-8
고려시대가 되면 4각형 평면에서 벗어난 다각형의 다층(多層)석탑이 우리나라 북쪽지방에서 주로 유행하게 되는데, 이 탑도 그러한 흐름 속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고려 전기 석탑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당시 불교문화 특유의 화려하고 귀족적인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으며, 전체적인 비례와 조각수법이 착실하여 다각다층석탑을 대표할 만하다. 정영호교수는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이 지니는 특수한 양식을부재별로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첫째 전체적으로 석탑의 평면이 8각형을 이루고 있어 선대의 방형 평면에서 벗어났다는 것,
둘째 다각이고 다층인데 그 특징이 있다.
셋째 기단부에 있어서 하층기단에 안상을 조각하고 연화대를 마련한 데에서 화사하고 장식적인 의장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하고, 상단괴임대와 탑신괴임석이 끼어져 있는 것도 한 특색이라 하겠다.
넷째 탑신부에 있어서 각 옥개석 하면의 처리가 각형과 호형받침으로 특이하게 이루어져 있으며 각층의 체감률이 적으나 기단부가 안정되어 오히려 경쾌한 느낌을 주고 있다. 그리고 상륜부재의 장식은 마치 공예탑의 일면에 보이는 것으로 나아가 석탑 전체를 장식적인 형태로 보이도록 하고 있으니 이것 또한 이 석탑만의 특이성이라 하겠다.
또한 청동으로 만들어진 풍경과 금동으로 만들어진 머리장식을 통해 금속공예의 수법을 살필 수 있어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현재 국보 제48-1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으며 전체 높이는 15.2m이다.
기단부는 4매로 결구된 팔각형의 지대석 위에 놓였는데 하층기단의 면석도 4매의 돌로 짜여졌으며, 8각의 각 면에는 2구씩의 안상이 음각되고 하층기단의 갑석 또한 4석으로 짜여졌는데 위에는 복판의 복연이 조각되었다.
그 위에는 상층기단 중석과의 사이에 별석이 삽입되었고, 별석의 윗면에는 괴임이 얕게 마련되었다. 탑신부는 위층으로 올라 갈수록 서서히 줄어들었으나 급격히 줄지 않고 2층 옥신부터 거의 같은 높이의 옥신을 유지하고 있는데 옥신석 또는 옥개석의 크기에 따라 2개 내지 3개의 석재를 사용하였고 상층부는 1석씩이다. 상륜부는 완전한 형태를 보이고 있는데, 노반ㆍ복발ㆍ앙화ㆍ보륜까지는 석재이고, 그 이상의 보개ㆍ수연ㆍ용차ㆍ보주 등은 금동제로 조성되었다. 찰주는 수철제(水鐵製)로 전체길이 4.3m인데 하부는 굵으며상부로 갈수록 가늘어지는 형상으로 9층에서 8층 옥개석까지 박혀있으며, 하부는 철편으로 고정시켰다. 중적된 상륜부재는 처음 석탑을 건립하였을 때의 것으로 보여지는데, 보개만은 여러차례 수리가 가해진 것으로 보인다.
1970년 10월 해체 복원시 5층 옥개석에서는 완형의 은제도금아미타여래입상(銀製鍍金阿彌陀如來立像, 높이 : 9.7㎝) 1구가, 1층 탑신 상면의 사리공에서는 각종 사리 장엄구가 발견되었다. 1층 탑신석에서 청동거울 4점, 청동합과 담홍색 사리 4과가 봉안된수정사리병, 전신사리경(全身舍利經), 금동방형향갑(金銅方形香匣), 황라니금연화수향(黃羅泥金蓮花繡香), 쌈지, 자색비단향주머니, 향초금보(香草錦褓) 및 향나무편과 향편(香片)이 출토되었다.
그리고 1ㆍ2ㆍ6ㆍ9층의 옥개석은 새로 조성되었다. 한편 이 석탑의 앞에는 한쪽 무릎을 꿇은 석조보살상 1구가 배치되어 있는데 이것은 강릉 신복사지 삼층석탑과 같은 형식이다. 이 석탑은 여러차례의 화재로 인하여 각 부재의 손상이 심하지만, 우수한 균형미를 구비하고 있어 고려시대 다각다층의 대표적 석탑이며, 분포면에 있어 팔각다층석탑으로는 가장 남쪽에 건립되었다는데 의의가 있다.
2023-11-01
강원특별자치도 평창군 진부면 오대산로 182
신라 선덕여왕 12년(643)에 자장율사가 창건한 월정사에 모셔진 보살상으로, 현세에서 자비로 중생을 구제한다는 의미를 지닌 관음보살을 표현한 작품이다. 손이 왼쪽과 오른쪽 어깨에 각각 3개씩 모두 6개가 달려 있어 육수관음보살로 불리며 금동으로 주조되어 있다. 머리에는 삼면화관(三面花冠)을 썼는데 꽃무늬와 불꽃 모양의 구슬이 새겨져 있으며, 양어깨에는 땋은 것 같은 두 가닥의 머리카락이 늘어져 있고, 노출된 가슴에는 구슬장식이 달린 목걸이가 길게 표현되었다. 6개의 손목에는 정교한 팔찌가 끼워져 있다. 상체는 나형(裸形)이나 천의(天衣)가 걸려 있으며 목과 가슴에는 영락(瓔珞)이 늘어져 있다. 불상(佛像)은 양어깨에서 3개씩의 팔이 뻗어 나와 6개의 손을 만들었으며 모든 손에는 정교(精巧)한 팔찌가 조식(調飾)되어 있다. 불신(佛身)은 가냘픈 모양이며 상체에 비해 하체가 비만하여 무릎 폭이 넓고 무릎을 덮고 있는 옷 주름의 표현은 투박하고 형식화되었다. 결가부좌(結跏趺坐)한 무릎 밑에 놓인 대좌(臺座)는 불신(佛身)의 윤곽을 따라 타원형이 되었고, 윗부분에는 단판연화(單瓣蓮花)를 앙련(仰蓮)으로 아랫부분은 복련(伏蓮)으로 연결되었다. 상하 끝에 각각 연주문(聯珠紋)이 있다. 불신이 가냘프고 불상의 주조법이 빼어나다고 볼 수는 없으나 전체적으로 균형미가 있고, 6개의 손이 돌출되었지만 어색한 점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조선시대의 작품으로는 걸작품이라 할 수 있다. 전체 높이는 45㎝이다.
2023-07-02
강원특별자치도 평창군 진부면 오대산로 1211-92
부도는 승려의 무덤을 상징하여 그 유골이나 사리를 모셔두는 곳이다.
이 부도밭은 월정사에서 상원사로 가는 길의 전나무 숲속에 자리하고 있는데, 모두 22기에 이르는 부도들이 흩어져 있다.
크기는 1~2m 내외의 그리 높지않은 체구로, 조선시대 중기 이후에 세웠을 것으로 추측된다.
운공성관(雲空性觀), 금성당(金聖堂) 등의 호를 가진 승려들의 사리를 모시고 있는 이 부도들은 낮은 받침위로 종모양의 탑몸돌을 올린 모습들이 대부분이나, 2층 기단(基壇)과 지붕돌을 갖춘 부도의 모습도 간혹 눈에 띈다.
2024-11-05
강원특별자치도 평창군 진부면 오대산로 1211-92
적멸보궁은 부처님 진신사리를 봉안한 곳이다. 적멸보궁은 모든 바깥 경계에 마음의 흔들림이 없고 번뇌가 없는 보배스러운 궁전이라는 뜻이다. 욕심과 성냄, 어리석음이 없으니 괴로울 것이 없는 부처님의 경지를 나타낸다. 적멸보궁은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어 법당 안에는 따로 부처님상을 조성하지 않고 불단만 설치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 적멸보궁은 비로봉에서 흘러내린 산맥들이 주위를 병풍처럼 둘러싼 중앙에 우뚝 솟아 있는 바, 나는 용(龍)이 여의주(如意珠)를 희롱하는 형국(形局)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 명당으로 많은 사람들의 동경의 대상이기도 하였다.
2024-11-13
강원특별자치도 평창군 진부면 오대산로 182
1868년(고종 5)에 제작되어 연대는 오래되지 않았지만 필선과 구도, 본존과 보살상의 얼굴모습, 산처럼 높이 솟아 있는 육계와 계주의 표현, 전체의 색조가 붉은 색과 파란색이 주조를 이루고 있는 점 등 19세기 중엽 이후 불화의 전형적인 특징을 모두 갖추고있으며, 보존상태가 매우 양호한 작품으로 그 보존가치가 크다. 이 탱화는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보덕사의 사성전에 봉안되어 있던 것인데, 1998년 9월 2일 월정사 성보박물관으로 옮겨져 전시중에 있다. 화기(畵記)와 복장주머니에서 발견된 원문(願文)을 통해 1868년(고종 5) 자우(慈雨), 창우(敞遇), 창택(敞澤) 등이 그린 것을 알 수 있다. 중앙에는 커다란 불좌상(佛坐像)이 있고 그 좌우에는 보살입상(菩薩立像)이 배치된 후불탱화(後佛幀畵)이다. 중앙의 본존(本尊)은 오른손은 어깨높이로 올려 엄지와 검지를 맞대고 있고, 왼손은 발목 위에서 손바닥을 위로 하여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는 설법인(說法印)을 짓고 있다. 본존은 사각형에 가까운 얼굴에 이목구비가 오밀조밀하고, 나발(螺髮)의 머리 위에는 육계가 높고 뾰족하게 솟아 있으며, 커다란 정상계주와 반달형의 중심계주가 뚜렷하다. 본존 앞에는 오른쪽에 코끼리를 타고 있는 보현동자(普賢童子)가, 왼쪽에는 사자를 타고 있는 문수동자(文殊童子)가 있다. 본존의 좌우에는 화려한 보관(寶冠)을 쓴 보살입상이 꽃가지를 들고 서있고, 그 뒤로는 10대제자가 좌우에 각 5구(軀)씩 배치되어 있다. 이 불화는 조성기를 통하여 정확한 제작연도와 작가를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보존상태도 지극히 양호한 작품이다. 또한 필선이나 구도, 본존 및 보살상의 얼굴모습, 그리고 산처럼 높이 솟아 있는 육계나 계주(계珠)의 표현, 아울러 전체의 색조가 붉은 색과 파란색이 주조를 이루고 있는 점 등은 19세기 중엽 이후 불화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복장유물로 원문(願文)은 1868년(同治 7년, 고종 5년) 탱화를 조성하면서 발원하는 내용을 기록하였으며, 기타 복장유물로는 다라니 2매와 후령통 1점 등이 있다. 《복장유물》 복장유물은 이 탱화의 상단에 걸려 있던 복장주머니에 봉안되어 있던 것으로, 원문(願文) 1매, 후령통(喉鈴筒) 등 《조상경(造像經)》의 「제불복장단의식(諸佛腹藏壇儀式)」에서 밝히고 있는 품목들을 자세히 볼 수 있다. 원문은 1868년(同治 7년, 고종 5년)에 탱화를 조성하면서 발원하는 내용을 기록하였는데, 화기와 비슷한 내용이다. 복장주머니(腹藏囊)는 탱화의 상단에 본존(本尊)을 중심으로 좌우에 하나씩 2개가 걸려 있는데 삼산형(三山形)의 상부와 타원형의 하부 등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후령통(가로 11㎝, 세로 3.3㎝, 높이 15㎝)은 사각형으로 종이로 만들었는데 위아래에한 글자씩 붉은 범자(梵字)를 썼고 안에는 5색(紅, 黃, 白, 靑, 綠)의 종이로 싼 오색의 실이 들어 있다. 그 외에도 후령통을 쌌던 보자기(黃梢幅子), 팔엽대홍련주(八葉大紅蓮呪), 천원(天圓), 지방(地方, 금강을 나열한 그림), 범자로쓰여진 진언(眞言) 2매(26×21㎝, 19.8×19.8㎝)와 오륜종자(五輪種子), 오방경(五方鏡), 범자를 한 글자씩 적은 작은 종이 등이 남아 있어 조상경(造像經)의 제불복장단의식(諸佛腹藏壇儀式)에서 언급된 의불화 복장의 일체 유물들을 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2023-07-02
강원특별자치도 평창군 진부면 오대산로 374-8
이 동종은 조선시대의 종 중에서도 극히 퇴락한 형식으로 양식적으로는 대수롭지 않지만 1787년(정조 11) 화천 용화산 용다사에서처음 주성되었다는 소위 원명과 1878년(고종 15) 양구 심곡사에 시주되었다는 추명이 있지만, 원주 구룡사에서 보관해 오던 동종이다.
이 시기에 한글 명문이 새겨진 종이 드물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크다.
1977년부터 강원도향토박물관에서 전시되다가 1999년 9월 월정사로 옮겨져 현재 성보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종의 정상부에는 한 몸체에 용머리가 서로 반대쪽으로 있는 오메가(Ω)형[一體雙頭形]의 용뉴가 있다. 천판(天板)은 반구형(半球形)으로 종신(鐘身)과의 사이에는 한 줄의 띠를 돌려 구분하고 있는데, 용뉴를 중심으로 연꽃무늬를 조잡하게 돋을새김(陽刻)하였다. 종신에는 세 줄의 띠를 돌려 4개의 부분으로 구획하였을 뿐, 상, 하대와 보살입상, 유곽 등 일체의 장식을구비하지 않고 소면(素面)으로 처리하였다.
그러나 종신의 상단부와 하단부에 각각 한글과 한자로 된 명문이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이중 하단부의 한자 명문은종을 처음 주성할 때의 주종기로, 1787년(건륭[乾隆] 52, 정조 11) 낭천(狼川) 용화산(龍華山) 용다사(龍茶寺)에서 처음 종을 주조하였음을 알 수 있다. 낭천은 현재의 화천군이며, 용화산은 화천군과 춘천시의 경계를 이루는 산이나 용다사는 그 위치를 알 수 없다.
상단부의 한글 명문은 종을 다시 시주될 당시의 발원문으로, 한글을 굵은 글씨로 잘 새기고 붉은 칠을 하였다. 내용은 1879년(광서[光緖] 5, 고종 16) 경성에 거주하는 청신녀(淸信女) 황씨(黃氏, 법명 蓮池願)가 양구군 동면 팔랑리의 심곡사에 시주했다는 것으로, 이러한 사실은《건봉사본말사적(乾鳳寺本末史蹟)》의 심곡사사적(深谷寺史蹟)에서도 확인된다.
이 종은 양식적으로 대수롭지는 않지만 소위 원명(原銘)과 추명(追銘)이 있으며, 이 종을 모셨던 두 절의 이름이 나오고, 한글명에대해서는 문헌에서도 확인이 되며, 이 시기에 한글명문이 새겨진 종은 그 예(例)가 드물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2023-10-17
강원특별자치도 평창군 진부면 오대산로 374-8
현재 월정사 성보박물관에는 중대 적멸보궁과 관련하여 작성시기가 다른 2종의 불량문이 소장되어 있는데 이 책은 그중의 하나다. 중대는 오대산신앙의 중심이며, 적멸보궁은 비로자나 법심불이 상주하는 장소로서 일찍부터 신성시되어 왔다. 또한 불량이란 뜻은 문자 그대로 부처님의 양식을 이르는 말이지만, 이보다는 어떤 전각이나 불상을 영구히 유지하기 위한 재정적인 후원을 의미한다. 『오대산중대불량문(五臺山中臺佛糧文)』은 조선후기의 중대 적멸보궁의 중창사실과 이를 재정적으로 후원한 일반 시주자 및 인근 사찰의 시주 스님을 기록한 것이다. 겉장은 황색 표지이며, 표지에는 ‘보궁유진 중대불량문’이라고 되어 있어서 적멸보궁(중대)에서 보관용으로 기록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사주단변과 계선을 검은색으로 그렸고, 반곽 8행에 글자 수는 16자~25자로 불규칙하다. 모두 20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크기는 반엽 34.7㎝×26.6㎝, 반곽 27.3㎝×23.6㎝이다. 첫 장의 ‘오대산중대 적멸궁불량단록서’는 재물을 출연하여 시주하는 공덕을 찬양하는 내용의 발문으로 사문경의가 작성한 것이다. 그리고 앞쪽에는 김수재를 비롯한 일반 대시주자의 이름과 소원문이 보이고이어서 본사 비구를 비롯하여 인근의 건봉사 및 경상도 은해사 스님들의 시주명이 차례로 기재되어 있으며, 권말에는 이를 증명하는 각사찰명이 지역별로 기재되어 있다. 간기는 말미에 ‘갑술육월일 적멸보궁서’로 표기되어 있는데, 연호 표기가 없어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없지만, 화주 영담 스님이『오대산중대불량계원수복문』(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35호)의 연기에도 나타나고 있어 갑술년은 1814년(순조 14)으로 판정된다. 따라서 이 책은 1814년 화주 영담 등이 중심이 되어 사문경의가 취지문을 작성하고 각 사찰 불자의 시주명을 기재하여 책으로 만들어 적멸보궁에 보관했던 것으로, 조선 후기 적멸보궁의 중창 사실과 이를 재정적으로 후원한 일반 시주자 및 인근 사찰의 면면을 알 수 있고, 당시의 사찰 연혁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2023-07-03
강원특별자치도 평창군 대화면 가평로 181-8
굽이치는 대화천과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금당계곡이 합류된 평창강을 따라 고봉과 절벽이 조화된 멋진 경관을 연출하고 있는 구간으로 주변경관을 조망하며 강변을 따라 걷는 길이다. 특히, 제3구간은 제방길과 강변길로 이루어져 있어 자전거 투어를 즐기기에 더 없이 좋은 곳이다. 주변의 산과 계곡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가르며 자연의 정취와 멋진 풍경을 가슴에 담을 수 있는 길이다.
2023-07-03
강원특별자치도 평창군 진부면 오대산로 176
현재 월정사 성보박물관에는 중대 적멸보궁과 관련하여 작성시기가 다른 2종의 불량문이 소장되어 있는데,『오대산중대불량계원수복문』은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34호로 지정된『오대산중대불량문』과 함께 전승되어 온 또 하나의 문건이다.
오대산중대불량계원수복문』의 앞부분은 1825년 서대에 소속되어 있던 논을 중대로 영원히 옮기면서 그 상세한 부동산 목록을 작성한 문건이다.
이어서 취봉(鷲峯) ․ 민현(愍玹)이 쓴 「오대산적멸보궁불량연기」가 있는데, 모연(募緣)의 의의를 강조한 글이다. 그 내용은 부처의 법신이 상주하는 적멸보궁이 점차 쇠락하자 본사의 화주 영담 장로가 이를 안타깝게 여기는 것을 보고 그의 문인 신운등이 앞장서서 권선한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뒷부분에는 이와 같이 취지에 동참한 인근 각지의 사찰과 소속 승려들의 명단을 수록하였다.
겉장은 황색 표지로, 표지에는 ‘중대불량계원수복문’이라고 필서하였다.「오대산적멸보궁불량연기」를 쓴 날짜가 ‘도광오년을유육월상한’으로 되어 있어 도광 5년에 작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주단변과 계선을 검은색으로 그렸고, 반곽 6행에 글자 수는 12자 내외로 불규칙하다. 모두 18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크기는 반엽(半葉) 41.0㎝×29.7㎝, 반곽 31.7㎝×25.4㎝이다.
이 책은 오대산 신앙의 중심인 중대 적멸보궁의 관리를 위해 사찰 내에서도 암자와 암자 사이에 부속 부동산을 옮겼다는 사실을 잘 보여 줄 뿐만 아니라 당시 적멸보궁의 세력권을 추정할 수 있는 문건이며, 또한 각 사찰에 소속되어 있는 승려들의 명단을 실었다는 점에서 조선 후기 강원도 내 사찰의 현황 등을 살 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