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3-16
경상남도 고성군 대가면 갈천로 620
갈천서원은 고려 공민왕 때 문신인 문정공 행촌 이암 선생을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한 서원이다. 이암 선생(1297~1364)은 고려 충선왕 5년(1313) 문과에 급제하였고, 공민왕 12년(1363)에는 1등 공신으로 철성부원군에 봉해지기도 했다. 갈천서원은 고려 공민왕 때 회화면에 금봉서원으로 세워졌으며, 조선 숙종 38년(1712년)에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겨 세우고, 갈천서원이라 하였다. 고종 6년(1869)에는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쇄되었다가 광복 후 유림들이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남아있는 건물로는 사우, 강당, 내삼문과 정문인 불사문이 있고, 사우에는 행촌 이암, 묵제 여필, 관포 어득강, 도촌 이숭의 위패를 모셔놓고 제사를 지내고 있다. 강당은 앞면 3칸, 옆면 2칸의 3량 구조의 팔작지붕 목조 와가로, 가운데 1칸을 대청으로 하고, 좌우에 방 1칸을 두고 우측 방 앞에 누마루가 있다. 정문인 불사문은 앞면 5칸, 옆면 1칸의 맞배지붕 솟을대문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 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가운데 1칸을 출입문으로 사용하고 있다.
2025-08-14
경상남도 진주시 이반성면 용암길 59-2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정문부를 모시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함북에 있는 네 개의 사우에 향사하였다가 1970년에 진주 향교 사람들의 공의와 후손들의 협찬에 의해 현 위치에 사우를 건립하였다. 그 후에 서원 내에 정문부 장군 유물전시관도 건립되었다. 충의공 농포 정문부(1565~1624)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1585년(선조 18) 생원이 되고 1588년 식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해 한성부참군이 되었다. 1590년 사헌부 지평으로 지제교를 겸했으며 함경북도 병마평사가 되어 북변의 여러 진을 순찰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의병을 조직하여 장덕산 전투, 쌍포 전투, 백탑교 전투에서 대승하여 관북 지방을 수복하였다. 시화에 연루되어 억울한 죽임을 당했으나 후에 복권되어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서원에는 가호서원, 충의사, 유물전시관, 보조묘, 장판각, 북관대첩비, 농포정문부사적비 등이 있으며 저서로는 <농포집>이 있다.
2024-11-11
경상북도 청도군 이서면 신촌길 110-27
훈령서원은 1699년(숙종 25)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고려 시대 문신 박양무의 절의와 도학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그 뒤 박계은, 박맹문, 박란 등 훌륭한 유학자들의 위패를 추가로 모시고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담당하였으나 1869년(고종 6)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후 서당으로 보존되다가 1998년에는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산형 대문을 들어서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정면 7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팔작 기와집인 강당이 자리 잡고 있고 강당의 우측 전면에는 4칸 규모의 팔작 기와집인 동재와 3칸 규모의 맞배 기와집인 숭절사를 배치하였다.
2024-11-13
경상북도 상주시 공성면 용신2길 51-23
효곡서원은 김충(1513~1572), 송량(1534~1618), 고인계(1594~1647), 김광두(1562~1608)를 제향 한 서원이다. 김충은 1515년(명종 6) 문과에 급제하여 춘추관, 기주관, 호조정랑 등을 역임하였다. 송량은 성운1497~1579)의 문인으로 헌릉참봉, 한성참군 등을 역임하였으며, 동지들과 함께 오현원을 창건하고 학규를 만들어 후진 양성에 전력하였다. 고인계는 북인에 가담하기를 거절하였다가 영서도찰방으로 좌천된 이후 사직하였다. 인조반정 후 성균관전적, 형조좌랑, 예안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김광두는 임진왜란 때 정경세, 이전, 이준 등과 함께 창의 하여 왜군을 격퇴하였다. 전란이 끝난 후 사설 의료원인 존애원을 설립하는 데 동참하였다. 효곡서원은 1685년(숙종 11) 송량을 배향한 세덕사로 출발하였다. 1724년(경종 4) 세덕사의 지세가 좁고 불편하여 공성면 각회산 아래로 이건 하였다. 1735년(영조 11) 김충과 고인계를 추배 하여 서원으로 승원 하였다. 1780년(정조 4) 각회산 아래에 있던 서원을 절동으로 이건 하였고, 1786년(정조 10) 김광두를 추배 하였다. 1870년(고종 7) 효곡서원은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훼철되었고, 1902년 유림의 공의로 단소를 설치하여 단향을 봉행하였다. 이후 1931년 효곡서원을 복원하자는 상주 유림의 공론이 취합되어 본래 자리에서 서북쪽로 약간 옮겨서 강당을 건립하였다. 1968년 비로소 묘우를 중건하여 단향을 폐지하고 복원 고유제를 봉행하였다.
2024-11-08
경상북도 칠곡군 석적읍 성곡2길 81-5
칠곡 화산서원은 장경우가 만년에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1651년(효종 2)에 성곡리 화산 아래 서당을 짓고 친히 화산서당이라 했다. 장경우는 사후 옥계사에 배향되고 건물은 돌보는 이가 없어 퇴폐하였다. 1840년(헌종 6)에 사림에서 당기를 봉두산 남쪽 기슭(현 석적읍 중리)으로 옮기고 건물도 5칸으로 넓혀 중건했다. 원래는 강당 건물만 있었던 듯하며 현재의 문간채는 터를 옮겨 중건하면서 건립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후 1844년 당 북쪽에 묘우를 세웠으나 흥선 대원군 서원 철폐령으로 1871년(고종 8)에 훼철되어 강당 건물만 남게 되었다.
2025-03-15
대구광역시 군위군 의흥면 금양3길 16-3
돈암공(遯巖公) 휘(諱) 손 기남(孫 起南)을 모시기 위하여 1726년 (영조 2)에 창건되었다가 1868년(고종 5)에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897년(광무 1년 丁酉)에 당시 의흥군수(義興郡守) 신태철(申泰哲)에 의해 복원되었다. 현재 생존해 있는 밀양손씨 후손들의 구전에 의하면 대원군의 서원 철폐당시 선조들 집집마다 화계서원의 주요 목재(기둥과 대들보 및 석가래 등)를 감추어 두었다가 새로 복원하여 숭덕사(崇德祠) 모성당(慕聖堂)으로 개칭하여 현재 보존하고 있다. 매년 음력 3월 첫째 일요일에 향사를 지낸다. (출처 : 군위군 문화관광)
2024-11-01
경상북도 구미시 수출대로23길 30 (황상동)
경상북도 구미시 황상동에 위치한 현암서원은 조선 중종 때 유학자인 죽정 장잠을 배향하는 서원이다. 정암 조광조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고, 1531년(중종 26)에 진사가 되었으며 도덕과 학문이 뛰어나 존경받았다. 현암서원은 1692년(숙종 18) 9월에 현암사우 2칸을 건립하고 위패를 봉안하였다. 그 후 1761년(영조 37)에 정당 4칸, 동서재 각 3칸, 정문 3칸 등을 건립하여 현암서원이라 하였다. 1692년(숙종 18) 9월에 인동 증봉산에 사우를 창건하였고, 1698년(숙종 24) 8월에 화동으로 이건 하였으며, 1739년(영조 15) 3월에 이현암의 동쪽으로 다시 이건하여 1761년(영조 37)에 사림의 공의에 따라 현암서원으로 승제되었다. 1871년(고종 8)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어 그 유지만 남아 있었다가 1993년 5월에 숭도사와 강당 5칸, 정문 3칸을 그 유지에 복원하였다.
2024-11-12
경상북도 봉화군 물야면 상황산길 6-62
행계서원은 김강이 학문을 연마하던 행계서사 자리에 1785년 행계서원으로 승격한 곳이다. 1804년(순조 4) 지방유림의 공의로 김강과 김홍제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시고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1868년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그 뒤 1925년에 복원하였으며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모현사, 6칸의 명륜당, 신문, 주소 등이 있다. 사우인 모현사의 중앙에는 김강과 김홍제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강당인 명륜당은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강론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2025-01-20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점곡길 15-8
후산정사는 만취당을 추모하고 후손들이 공부하고 수양하는 목적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경내에는 강학을 주로 하는 정자(후산정사)가 있고, 향사를 지내는 사당, 그리고 음식을 제공하는 주사로 이루어져 있다. 이곳에는 수령 350년이나 된 향나무 두 그루와 회화나무 고목이 있어서 고택의 정취를 더하고 있다. (출처 : 의성군 문화관광 홈페이지)
2024-06-19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 호계길 183
낙동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자리 잡은 호계서원은 안동 지방의 대표적인 서원이다. 1573년 지방 사림들이 백련사 절터에 여강서원을 세워 퇴계 이황의 위패를 봉안하고 도학을 강론하였는데, 1605년 이곳이 대홍수로 인해 유실되었다. 이후 1620년 이황의 큰 제자인 서애 류성룡과 학봉 김성일의 위패를 추가 배향하고 1676년 사액을 받고 ‘호계’로 이름을 바꾸었다. 원래 월곡면 도곡동에 있었으나 안동댐 건설 수몰지구로 1973년 지금의 위치로 옮겨 세웠다. 호계서원은 안동 유림의 본거지이자 안동 선비문화의 상징으로, 300여 년 동안 안동 정신문화의 중심 역할을 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