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10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 외무길 30-24
이 서원은 전원발(全元發)을 봉향하기 위해 위패를 모시고 1701년(숙종 27)에 건립하였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해 오다가 1869년(고종 6)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서원이 훼철되었고 1918년 중건되었다가 1968년 복원되었다. 서원은 소천마을 북서쪽 금천변 산 밑에 자리 잡고 있다. 건물은 외삼문, 강당, 내삼문, 사당이 동일축선상에 배치되어 있다. 강당인 전교당(典敎堂)은 정면 4칸, 측면 1칸 반의 팔작지붕 기와집이고, 사당은 숭덕사(崇德祠)이며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맞배지붕 기와집이다. 그 이외에 소천서원과 관련된 소천재(蘇川齋)와 청원정(淸遠亭) 등의 건물이 주변에 위치하고 있다. 소천재는 재실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이고, 청원정은 정자건물로 경관이 뛰어나다.
2024-11-01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소양서원길 8
소양서원은 문경시 가은읍 전곡리 마을 중간쯤 전망이 아주 좋은 곳에 뒷산을 등지고 남향으로 위치하고 있으며, 강학과 제향공간이 각기 별도의 곽을 이루며 앞뒤로 배치하고 있다. 고종 8년(1987) 서원 훼철 당시 사당만 철거되고 강당과 동재는 존치되었으며, 강당은 당시의 모습이 비교적 잘 남아 있다. 강당의 천장은 양측 청방 간 상부의 종보와 종보사이에 종보폭으로 길게 설치하였으며, 반자꾸밈은 반자대를 도리방향으로 길게 걸치고, 그 사이에 반자판을 끼워 독특한 천장 구성을 이루고 있는 등 건축적 가치를 살필 수 있다. 또한 16세기 가은 인근 지역에서 출생하여 각각 예조좌랑, 형조좌랑 등 중앙관직에 나아가 활동하다가 만년에는 고향으로 돌아와 지역 발전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 나암 정언신, 인백당 김낙춘, 고산 남영, 가은 심대부 및 가은 이심 5인을 배향하고 있어 역사적으로도 주목되는 서원이다.
2024-11-12
경상북도 칠곡군 기산면 지산로 807-11
소암서당은 투암 채몽연(1561~1638), 백포 채무(1588~1670), 극명당 장내범(1563~1640)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서원이다. 1703년(숙종 29) 유학자인 장벽, 장세휘, 박정석 등 20여 명이 소암동 팜암바위 뒷산에 사당과 강당을 지어 소암사라하고 같은 해, 1712년(숙종 38)에 투암, 백포 부자를 봉안하였다. 1803년(순조 3)에 서원으로 승격하고 1847년(헌종 13)에는 극명당을 배향하였으나 1871년, 서원 철폐령에 의하여 모두 훼철되었다. 이후 1932년, 강당을 복원하고 이를 소암서당이라 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강당 대청 상부에는 기문 등이 남아 있다.
2024-12-04
경상북도 김천시 대덕면 조룡길 512-5
섬계서원은 경상북도 김천시 대덕면 조룡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서원이다. 섬계서원은 단종 복위를 꾀하다 순절한 충의공(忠毅公)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의 충절을 숙모(肅慕)하고 현창 하고자 창건했다. 지금은 조룡리로 바뀐 섬계리는 김문기를 중시조로 하는 김녕 김씨 집성촌이다. 경내는 강당과 사당 구역으로 대별되며 경내로 진입할수록 표고가 높아져 산으로 닿는다. 중심 건물에 해당하는 경의재는 석축 기단 위에 섰으며 정면 4칸, 측면 2칸 반의 단층 겹처마 팔작지붕 구조이다. 가운데 2칸은 대청이며 내진주(內陣柱)가 있고, 양쪽 협간은 온돌방으로 구성했다. 세충사와 동별묘는 그 동편에 위치한다.
2022-05-24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2길 23
1651년(효종 2) 이정(李楨)을 중심으로 한 지방유림의 공의로 설총(薛聰)·김유신(金庾信)·최치원(崔致遠)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처음은 선도산(仙桃山) 아래 서악정사(西岳精舍)로 창건하여 향사를 지내오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00년(선조 33) 서원터의 초사(草舍)에 위패를 봉안하였다. 1602년 묘우(廟宇)를 신축하고 1610년 강당과 재사(齋舍)를 중건하였다. 1623년(인조 1) ‘西岳(서악)’이라고 사액되었다. 대원군의 서원철폐시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며, 1873년에 중수하여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묘우, 5칸의 시습당(時習堂), 5칸의 절차헌(切嗟軒), 5칸의 조설헌(譟雪軒), 영귀루(詠歸樓), 3칸의 전사청(奠祀廳), 4칸의 고자실(庫子室), 도동문(道東門)·외문(外門)·내문(內門) 등이 있다. 묘우에는 설총·김유신·최치원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강당인 조설헌은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의 강론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시습당과 절차헌은 유생들이 공부하며 거처하는 곳이고, 영귀루는 누각이며, 전사청은 향례 때 제수(祭需)를 마련하여 두는 곳이고, 고자실은 고자들이 거처하는 곳이다. 이 서원에서는 매년 2월 중정(中丁 : 두 번째 丁日)과 8월 중정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제품(祭品)은 7변(籩) 7두(豆)이다. 경상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으며, 유물로는 문집 몇 권이 있다. 재산으로는 대지 1,100여 평, 답 3,600여 평, 임야 3,400평 등이 있다.
2024-11-12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생기마1길 24
과거 닭실마을로 오르는 초입 부분 우측 편에 자리하고 있는 삼계서원은 조선 중종 때 명신 충재 권벌(1478∼1548)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당시 안동부사였던 김우옹이 조선 선조 21년(1588)에 건립하였다고 한다. 권벌은 연산군 2년(1496)에 진사가 되고 중종 2년(1507)에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지냈다. 명종 2년(1547)에 양재역벽서사건에 연루되어 평안도 삭주에 유배되었으며, 이듬해에 그곳에서 죽었다. 조선 선조 31년(1601)에 한강 정구가 사당을 충정공사, 당호를 정일당, 동재를 사무사, 서재를 무불경, 정문을 환성문, 문루를 관물루라 각각 명명하였다. 그리고 현종 1년(1660)에 삼계서원으로 사액받았다. 고종 5년(1868)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충정공사, 환성문, 관물루가 훼철되었다가 1951년에 복원하였다. 서원의 배치는 앞에는 공부하는 공간을 두고, 뒤에는 제사 지내는 사당을 배치한 전학후묘의 형식이다. 서원 출입은 전면에 자리하고 있는 중층의 관물루 아래에 설치된 환성문으로 들 수 있도록 하였으며 문을 들어서면 전면에 강당이 자리하고 전면 좌우에 동·서재가 있다. 강당 우측으로 돌아들면 토담장으로 공간이 구획된 제향공간인 사당(충정공사)이 자리하고 있으며 서재 좌측 편에 서원을 관리하는 관리사가 대문채를 두고 위치하고 있다. 동재 전면 우측에는 1906년 사림에서 세웠다는 신도비와 비각이 자리하고 있으며 서원 좌측에 관리사가 있다. 봉화 삼계서원은 정연한 전학후묘의 배치법을 지니고 있으며 공간의 위계성이 돋보인다. 관물루와 사당은 복원된 건물로 당시의 모습은 지니지 못하고 있으나 동재와 서재에서 당시의 모습을 부분적이나마 찾을 수 있다. 또한 닭실마을과 연계되는 삼계서원의 위치와 충재선생의 인물사적 측면과 더불어 고려할 때 가치 있는 자료로 평가된다.
2024-11-08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신동서원길 15-10
사양서당은 본래 조선 시대 서원으로, 1651년(효종 2) 유학자 한강 정구(1543~1620)가 일생 동안 학업을 닦던 사수동에 창건된 후 1694년(숙종 20)에 지천면 신리 섬마 마을로 옮겨 한강 선생을 주벽으로 석담 이윤우를 배향하고 송암 이원경을 별사에 모셨다. 창건 당시에는 강당 외에 묘우와 강당, 폄우제, 정완재, 봉하문, 양현청, 주고 등이 있었으나 1868년(고종 5)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헐리고 지금은 강당인 경회당과 솟을대문, 변소만 남아있다. 강당인 경회당은 경상북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사양서당은 방형의 평탄한 대지에 강당과 솟을대문을 二자형으로 배치하고 주위에 토담을 쌓았다. 강당인 경회당은 조선 후기에 지은 이익공계 건물로, 정면 5칸, 측면 1칸 반의 규모이다. 평면은 가운데 3칸의 넓은 대청을 두고 그 좌우에 온돌방을 둔 형태이다. 대청과 온돌방 앞에는 개방된 반칸 폭의 툇마루를 꾸몄다. 지붕은 박공지붕에 한식 기와를 덮었다. 솟을대문은 정면 5칸, 측면 1칸의 규모로 가운데 있는 대문간의 지붕을 솟을지붕으로 지었다.
2025-06-26
경상북도 청도군 금천면 선암로 455-27
이 서원은 동창천 물이 굽이쳐 흐르는 선암(仙巖)에 자리 잡고 있다. 김대유(金大有)와 박하담(朴河淡)을 향사(享祀)하던 곳이다. 초기 창건은 1568년(선조 1) 매전면운수정(雲樹亭)에 두 분의 위패를 봉안하고 향사하여 향현사(鄕賢祠)라 하였다. 이곳은 1577년(선조 10) 군수 황응규(黃應奎)의 주선으로 사우(祠宇)와 위패(位牌)를 옮겨 선암서원이라 개칭하였는데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 지금의 건물들은 1878년(고종 15) 박하담(朴河淡)의 후손들이 다시 중창하여 선암서당으로 고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2024-04-30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장기면 산서길 98
서산서원은 포항시 남구에 있는 조선시대 서원으로 고려 때 예조판서를 지낸 김충한과 그의 후손 김응장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1760년 지방 유림의 공의로 김충한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서원을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1868년에 훼철되었다가 1907년 복원되었다. 경내에는 사우, 강당, 동재, 서재, 내삼문 등이 들어서 있다. 사우인 입아사는 3칸 규모의 건물로 김충한과 김헌장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강당인 숭인당은 가운데 마루와 양옆에 협실이 있으며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는 각각 3칸 규모의 건물이다. 서산서원은 경주 김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해마다 음력 9월 중정일에 제사를 지낸다.
2024-06-14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 푸레실길 82
이 서원은 조선 중기 학자 청계 김진(1500~1580) 선생과 그의 아들 5형제의 유덕을 추모하고 후학을 양성할 목적으로 1709년 사림과 자손들의 공의에 의하여 세워졌다. 1871년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훼철되어, 중건과 이전을 거듭하여 현재의 모습인 강당과 주사만 남아 있다. 당초에는 임하면 사의동에 위치하였으나 임하댐 건설로 인해 1987년 현 위치로 옮겨졌다. 강당은 정면 6칸, 측면 2칸의 제법 규모가 큰 편에 속한다. 자연석 기단 위에 자연석 주초를 놓고 그 위에 원주와 각주를 혼용해서 세웠는데 중앙 대청은 정면 4칸으로 매우 넓게 하였다. 대청을 중심으로 해서 좌우에 통칸 온돌방이 드리워져 있어 일반적인 강당 평면형식이다. 우물마루 상부는 5량가로 구성되어 있으며 박공지붕이다. 건물 정면에는 ′경덕사′라는 편액이 있는데 이것은 묘우의 현판을 강당에 옮긴 것으로 보인다. 현재 교육 기능은 사라지고 매년 3월과 9월 중정에 향사를 지낸다. 사빈서원 입구 경원루 앞에는 널리 배우고 독실하게 실천하자라는 뜻의 [박학독행] 비석이 새겨져 있으며, 옆에는 유교 문화를 계승하고 선비 양성을 위해 지은 금장각 도서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