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23
강원특별자치도 양양군 양양읍 서원길 44-9
조산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서원으로, 1628년 지방 유림의 공의로 조인벽의 충절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충현사를 설립해 위패를 모시고 동명서원이라 하였다. 양렬공 조인벽은 태조 이성계의 간곡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불사이군(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의 의리를 지키며 양양에서 은거하며 유생들을 교육했던 사람이다.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전란으로 전소되어 1787년 경상북도 봉화로 옮겨서 복원하였다. 그 후로도 철폐와 복원을 반복하다 1974년부터 서원 복원 추진 위원회가 구성되어 복원을 추진, 1982년에 완공하였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충현사, 6칸의 재실, 신문, 동·서 협문 등이 있으며, 사우인 충현사에는 조인벽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재실은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제향 때 제관들의 숙소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곳에서는 매년 춘향제를 올리고 있으며, 서원 입구에서는 붉은색의 홍살 문과 함께 양렬공 조인벽의 신도비를 볼 수 있다.
2025-03-16
강원특별자치도 홍천군 서면 팔봉산로 1198-2
노동서원(魯東書院)은 우리나라 사학의 원조인 최충(崔冲)의 영정과 위패, 그리고 그의 아들인 최유선(崔惟善)을 봉안하고 있다. 최충의 12대 손인 최변이 이곳에 낙향하여 자손들이 번창하자 선생의 영정을 모신 영당을 지었다가 후에 노동서원이라 개칭되었다. 서원에 봉안된 두 영정은 강원특별자치도 유형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노동서원은 유교적 전통문화 계승과 발전을 위한 행사의 장으로도 쓰이며 특히 인근 초·중·고 학생들의 유적순례지로서 좋은 장소가 되고 있다. 본 서원은 원래 홍천군 북방면 노일리에 있던 것을 수호(守護)의 어려움으로 인 하여 1932년 5월에 이곳으로 옮겼으며 6·25 동란에 소실된 동재와 서재 일부를 개축하고 수차례에 걸쳐 중수하였다. 또한 정례행사인 제향을 유림행사로서 받들며 연 1회 봉제사를 올린다.
2025-08-06
강원특별자치도 철원군 근남면 호국로 7003-23
철원군 근남면 사곡2리에 위치하는 구은사는 서기 1455년 단종 때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에 비분을 품고 산간으로 은거하여 불사이군의 지조로 일생을 마친 아홉 선비(김시습, 조상치, 박도, 박재, 박규손, 박효손, 박천손, 박인손, 박계손)의 충절을 모신 사당이다. 아홉 선비는 근남면 육단리, 잠곡리, 사곡리 등의 산간 계곡에 초막을 치고 은거하면서 권농에 힘쓰는 한편 사곡리 속계천(束溪川)변 행화정에 모여 바둑을 두면서 세상사를 논했는데 그 후 시운이 맞지 않아 각처로 뿔뿔이 흩어져 버리니 조선 인조 9년(서기 1631년)에 이르러 이지연 선생 등 여러 선비들이 뜻을 모아 사당을 짓고 매년 봄가을 추모제를 지냈다. 서기 1865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는 철폐의 비운을 맞았으나 1921년 사당을 재건하고 6·25전쟁으로 다시 황폐화된 것을 지방유지들의 도움으로 1977년 중건(重建)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2025-04-30
경기도 김포시 양촌읍 황금로23번길 30-32
대포서원은 경기도 김포시 양촌읍 야산에 위치하였으며, 조선 전기의 대학자이자 문신인 눌재 양성지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양성지는 공조판서, 대사헌을 거쳐 홍문관 대제학 등을 역임한 당애 최고의 문장가이자 사상가로 세종부터 성종까지 여섯 임금을 섬기며 경륜 있는 정치가로 활약하였다. 조선 시대 책 동문선, 고려사, 고려사절요, 동국통감 등의 편찬에 기여했으며, 지리와 지도 전문가로도 뚜렷한 족적을 남겼고, 홍문관과 규장각의 설치를 주장하기도 했다. 양성지는 1482년에 68세를 일기로 통진현 대포곡에 묻혔다. 1973년 양촌면 대포리에 있는 양성지의 묘소 밑에 사우를 창건하였으며, 그곳 지명을 따서 대포서원이라 했다. 서원은 강학 공간인 동재와 서재, 제향 공간인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는 전형적인 전학 후묘의 구조이다. 매년 4월 25일 이곳에서는 양성지를 기리는 대제가 치러진다.
2025-06-30
경기도 여주시 청심로 113 (하동)
강한사는 조선 중기 학자이며 정치가인 송시열(1607년-1689년)의 뜻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 송시열은 생전에 영의정까지 지낸 인물로 경기도 여주에 머물 때마다, 영릉(효종의 능)을 바라보며 효종의 북벌 정책에 대한 대의를 주장하였다고 한다. 이후에 정조가 영릉에 행차하다가, 이 이야기를 듣고 김양행에게 송시열의 사당을 짓게 하였고, 송시열을 높여 ‘대로’의 명칭을 붙여 사당을 ‘대로사’라 하였다. 그 뒤 1873년 10월 고종에 의해 ‘강한사’로 이름이 바뀌면서 현재에는 대로사 또는 강한사라 불리고 있다. 사당은 고종의 서원철폐(1871년 전국의 47개소 서원(사우 포함)만 남기고 모두 없앰)에도 피해를 입지 않았다. 강한사는 크게 사당과 강당 영역으로 구성되어있다. 사당의 규모는 앞면 3칸, 옆면 2칸의 크기이며,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그리고 강당의 규모는 정면 5칸, 옆면 3칸의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이외에도 재실인 추양재, 대로사비각, 홍살문 등으로 구성되어있다. 강한사의 사당은 특이하게도 서향을 하고 있는데 이는 영릉을 바라보기 위한 것으로, 임금과 신하 사이의 의리를 보여 주는 것이라 전하고 있다. (출처 : 국가유산청 홈페이지)
2025-07-03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충렬로 9-19
충렬서원은 선조 9년(1576)에 지방 유림들이 뜻을 모아 정몽주[鄭夢周, 1337~1392]와 조광조[趙光祖, 1482~1520]의 학문과 덕행, 충성스러운 절개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충렬사[忠烈祠]에서 시작되었다. 충렬사는 정몽주와 조광조의 묘소 중간 지역인 죽전에 창건하였다.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된 후 선조 38년(1605) 경기도관찰사 이정구, 용인현감 정종선 등이 정몽주의 묘가 있는 모현읍에 옮겨 중건을 시작하였다. 1608년에 사당 3칸, 동재와 서재 각 2칸, 문루 3칸 규모로 완성하고 문루 위에는 강당을 지었다. 이 때 조광조의 위패는 새로 창건된 심곡서원으로 옮겨졌다. 광해군 즉위년(1608년)에 충렬서원으로 사액(임금이 사당, 서원 등에 이름을 지어서 새긴 현판을 내리는 일)되었고, 이후 정몽주의 손자 정보와 병자호란 때의 충신인 이시직을 추가로 모셨다. 고종 8년(1871)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11년 사당이 중건되었고, 1956년에 강당을 복원하였으며 1972년 전체를 보완·신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당 중앙에는 정몽주의 위패와 영정을 봉안하고, 좌·우 위에 정보와 이시직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출처 : 국가유산청 홈페이지)
2025-03-19
경기도 연천군 연천읍 동막로25번길 170
서원은 조선 중기 이후 학문연구와 선현제향을 위하여 사림에 의해 설립된 사설교육기관인 동시에 향촌자치운영기구였다. 임장서원은 조선 중기 중종 때 임계중[任繼重]이 정계를 은퇴하고 낙향하여 학문 연구에 전념하기 위해 건립한 무이정사[武夷精舍]를 모태로 하여 창건되었다. 이후 1700년에 주자서원[朱子書院] 창건하여 주자의 위패를 모셨다. 현재의 서원 건물은 1995년부터 1998년 사이에 재건된 것으로 서원은 남향하여 삼문(三門)이 있고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사우형식을 갖춘 목조 맞배지붕의 대성전이 있다. (출처 : 연천군청 문화관광 홈페이지)
2024-12-09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남한산성로 732-42
현절사는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 안에 있는 곳으로, 병자호란 당시 청에 항복하기를 거부하다가 심양으로 끌려가 처형당한 홍익한, 윤집, 오달제 삼학사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사당이다. 숙종 25년에는 삼학사와 함께 항복하기를 거부한 문정공 김상헌과 정온의 위패도 함께 모시게 되었다. 조선 숙종 14년(1688)에 그들이 끝까지 척화의 의리를 내세우던 곳인 남한산성 기슭에 지었으며, 숙종 19년(1693)에는 나라에서 〔현절사〕라 이름을 지어 현판을 내렸다. 현절사는 앞면 3칸, 옆면 2칸의 규모로, 지붕은 옆면이 [사람 인] 모양의 맞배지붕이다. 앞면은 제사 지낼 때 활용할 수 있도록 퇴칸으로 개방하였고, 옆면은 바람막이 풍판을 달고 방화벽으로 마감하였다. 고종 8년(1871) 전국의 서원 및 사우에 대한 대대적인 철폐 때에도 제외되어 지금까지 존속되고 있다. 현절사는 평상시에는 개방되어 있지 않고 매년 춘계(음력 3월 중정일)와 추계(음력 9월 중정일), 2회에 걸쳐 우국충절을 기리기 위한 제향을 지낼 때만 개방되므로 방문 시에 참고하도록 한다.
2025-03-19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용문산로192번길 16-21
1594년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조욱(趙昱)과 조성(趙晟)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713년에 ‘운계(雲谿)’라고 사액되었다. 1714년에 신변(申抃)·조형생(趙亨生)·조문형(趙門衡)을 추가 배향하여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왔다. 1871년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로 훼철되어 위패를 서원터에 매안(埋安)하고 향사만 지내왔다. 그 뒤 1932년에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내 건물로는 6칸의 사우(祠宇), 6칸의 강당, 신문(神門), 동서 협문(夾門) 등이 있다. 사우에는 조욱을 주벽(主壁)으로 조성·조형생·신변·조문형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강당은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 강론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2025-01-21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감내길 25-10 (성석동)
용강서원은 조선 개국 초기 충신 충민공 박순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이다. 1686년 조선 태종 때 함경도 함흥에 머물던 태조 이성계를 모시고자 문안사로 보내졌다가 한양으로 돌아오던 중 주위 신하들의 모함으로 인해 태조에 의해 죽임을 당한 박순을 제향 하기 위해 세운 곳으로, 본래 그가 죽은 함경도 용흥강변에 설립되어 있었다. 이후 훼철되었다가 분단 이후 1980년에 박순의 부인인 장흥 임 씨의 묘역이 위치한 고양시 학령산 아래의 현 위치에 재건하였다. 서원은 사당과 재실, 태극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사당에는 전면에 용강서원 현판이 걸려있다. 재실은 강당을 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