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의도 토지항쟁비 - 주변 여행 및 근처 관광 명소 - 국내 여행 정보

한국관광공사에서 제공하는 공공데이터를 활용하여 하의도 토지항쟁비 - 주변 여행 및 근처 관광 명소 정보를 소개합니다.

하의도 토지항쟁비

13.9 Km    17615     2024-05-31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면 웅곡리

[하의도 토지항쟁 공적비군] 하의도에는 하의3도(하의도, 상태도, 하태도) 농민들의 역사와 저항 정신을 기리기 위해 2009년에 개관한 하의3도 농민운동 기념관이 있다. 하의3도 농민운동은 간척으로 생긴 토지로 부당이득을 취하려 했던 조선시대 세도가에 대한 항쟁에서부터 일제강점기 소작료 거부 등 오랜 시간 투쟁으로 이어진 역사이다. 기념관 옆 마당에는 토지 운동 과정에서 섬 주민들을 위해 공을 세운 사람들의 공적을 기리기 위한 공적비 3기와 하의도 주민들이 어려울 때 도움을 주었던 사람들의 공적비 2기가 있다. 마을 제사 때 황소를 기증한 문응두를 기리기 위해 1885년에 세운 공적비와 흉년으로 주민들의 생활이 어려울 때 구휼에 힘쓴 권재찬의 영세불망비(1903년), 조선 선조 맏딸 정명공주의 8대손 홍우록 등과 하의도 토지를 두고 법정 공방을 벌일 때 하의 농민들의 편에서 활동했던 당시 군수 김동우, 일본인 변호사 고노오 토라노스케, 사무원 남만웅의 영세불망비(1912년)가 그것이다. 이들 비석은 웅곡선착장에 있었다가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하의도 토지항쟁역사] 예로부터 농사를 주업으로 살아온 하의도 사람들에게 토지는 삶의 원천이고 자부심이었는데, 하의도 사람들은 이 땅에 대한 피와 눈물이 맺힌 삼백 년에 걸친 통한의 역사를 안고 있다. 하의도 농민운동의 역사는 조선시대 선조 때 임진왜란 직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선조는 맏딸 정명공주의 불치병을 치료한 홍계원을 부마로 삼고 하의3도(하의도, 상태도, 하태도)를 그에게 무토사패(나라에서 받을 토지세를 대신 받음)로 준다. 그러나, 정명공주의 증손자인 홍석보가 죽으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정명공주에게 준 면세전 20결이 그 후손들에게 상속되었는데, 그 후손들은 세섬의 모든 토지에 대한 절수권(국가 대신 세금을 받을 권리)을 받았다면서 백성들이 경작하는 모든 토지에서 세금을 받아간 것이다. 백성들은 억울함을 호소하였으나 무모한 일이 되고, 세월이흘러 홍씨들이 권좌에서 물러나고 1870년 이완용의 아버지 이호준이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하자 다시 하의 사람들의 진정이 시작된다. 이 감사는 모든 토지에 대해 1부에 백미 2되씩만 홍씨들에게 주라고 판결해 주었으며, 이에 대해 하의도 사람들은 송변준의 글씨로 옥도에 송덕비를 세웠다. 이 후 하의도는 1901년 토지지권발급으로 인해 토지가옥 증명규칙을 만들어 모든 부동산의 문서화에 착수하는 과정에서 하의도 토지는 모두 궁토로 간주되어 왕실 재산을 관리하는 내장원 토지로 등재된다. 1905년 일본 조선 통감부는 역둔토 조사사업을 벌이면서 모든 궁토도 역둔토로 통합해 국유화 조치를 취하는데, 이 때 홍씨들은 하의 3도의 토지를 국유화에서 탈루시켜 홍우록의 사유지로 지권을 발급받는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하의도 사람들은 같은 해 6월 각계에 진정서를 내고 즉시 경성지방법원 소송을 제기했다. 홍우록은 일본인과 한국인 무리배들을 하의도에 보내소작료를 받도록 했으나, 당시면장 김준열을 비롯한 주민들의 강력한 항의를 받고 철수했다. 이 때 김 면장은 목포에서 몰려온 깡패들에게 맞은 여독으로 10일만에 죽고 문경수씨는 총상을 입기도 했다. 이처럼 하의도 소유권행사가 순조롭지 못했던데다 후손간의 분쟁도 있어 홍우록은 지권을 집안의 홍우승에게 양도해 버렸고, 홍우승은 다시 서울갑부 조병택에게 1만 5천원의 값으로 팔아 넘겨 버렸다. 이에 하의도 사람들은 일본인 변호사를 선정해 홍씨들을 상대로 부당 이득반환 및 토지확인 청구소송을 제기해서 1심에서는 패하고 2심에서 승소하였다. 하의도 주민들은 이 사건의 변호를 맡았던 일본인 변호사 ‘목미호지조’ 와 사무원 남만웅의 송덕비를를 하의도에 세웠다.

하의도

14.2 Km    31477     2023-05-15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면 곰실길 20

연화부수(蓮花浮水). 물 위에 연꽃이 떠있는 모습이라 하여 ‘하의도'라 부르게 되었으며, 유인도 9개, 무인도 47개로 구성되어 있다. 야산으로 된 지형은 농업용수와 식수에 어려움이 많고 천일염과 수산양식으로 소득을 높이고 있으며, 신도와 대야도는 모래밭과 송림이 좋아 천혜의 해수욕장이 되고 있다. 하의도 웅곡포구에 들어서면 어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고깃배조차 눈에 띄지 않고 넓은 들판이 있다. 하의도 마을들은 대부분 산기슭에 자리하고 있고 섬 전체가 논밭으로 가득차 있어 섬처럼 느껴지지 않는 섬이다. 하의도 사람들은 예로부터 농사를 주업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그들에게 토지는 삶의 원천이고 자부심이었으나, 하의도 사람들은 이 땅에 대한 피와 눈물이 맺힌 3백년에 걸친 통한의 역사를 안고 있다. 하의도 농민운동의 역사는 지금도 하의도 토지항쟁비가 말해주고 있다. 하의도는 지조 높은 유학자 초암 김련 선생의 고장이기도 하다. 유학자 초암 김련 선생은 어려운 가정형편 속에서도 서당에서 후학들을 가르치기 위해 당시 신간서적이라면 국내는 물론 중국, 일본까지 다니면서 2,000여권의 고서(필사본)를 모았던 분이다. 당시 초암의 높은 학문을 배우기 위해 나주, 신안의 모든 지역에서 수 천명의 제자들이 모여 들었고, 제자들은 선생의 높은 뜻을 기리고자 덕봉강당을 건축하였다. 현재는 초암 선생의 아들인 김춘배 옹(1912년생)이 관리하고 있는데, 대를 이어 책 관리는 물론 5선현의 제사도 지내고 있다. 그러나 '하의도'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김대중 대통령의 고향'이라는 것이다. 신안의 작은 섬 하의도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의 상징이며,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김대중 대통령을 배출해낸 것은 너무도 자랑스러운 일이다. 김 대통령 당선 직전 수많은 내외신 기자들이 방문한데 이어 요즘에는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오고 있는 김대중 대통령의 생가는 집터만 남아있던 생가의 구조물을 그대로 이용하여 후광리에 대지 746평, 건평 18평의 6칸 접집으로 60여 년만에 원형대로 복원하였으며, 군에서는 복원된 김대통령 생가를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해 주변에 화장실 등 기본시설을 갖춰 찾아오는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하의도 야외 조각미술관

14.4 Km    0     2023-12-11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면 웅곡리

[천사(1004)의 섬]으로 불리는 신안군은 1도 1뮤지엄 프로젝트로 문화 인프라가 상대적으로 열악한 섬 지역에 예술의 옷을 입히겠다는 취지로 설립된 개방형 미술관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비롯해서 농민봉기 등 인권과 민주, 평화라는 수식어가 잘 어울리는 섬인 하의도가 천사들의 안식처처럼 느껴진 것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어졌다고 한다. 미술관에서는 조각상 318점과 조형물 3점이 상설 전시되고 있다. 하의도 일주 도로에 다양한 천사상들이 자리 잡고 있어, 누구나 언제든 찾아와 머물 수 있는 [울타리가 없는 미술관]으로 조성되었다. 설치된 천사상 318점은 파리 아트 저널에서 1999년 [21세기를 이끌어가는 예술인]에 선정된 대표 작가 최바오로를 비롯하여 크리스티나 델라로사, 왕첸, 영월종교미술 박물관 소속 작가 일동 등이 만든 조각상들로 구성되어 있다. 미술관의 수많은 조각상 중 같은 표정과 행동을 하고 있는 천사는 단 한 개도 없는 점이 관람의 포인트이다.

십일시장 (4, 10일)

십일시장 (4, 10일)

14.7 Km    12480     2023-12-08

전라남도 진도군 임회면 석교리 245-1
061-540-3605

진도군 임회면 석교리의 자연마을인 십일시리에서 장이 선다. ‘십일시리’라는 지명 역시 10일장이 열린 데에서 비롯되었다. 일제 강점기까지는 10, 20, 30일에 장이 섰으나 이후 경제가 성장하면서 오일장의 형태로 바뀌어 4, 10, 14, 20, 24, 30일에 장이 열린다. 고추, 마늘, 채소류, 어물류, 잡화류를 판매하고 있다.

신도

14.9 Km    17016     2023-08-28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면 신도길 34

섬에 땔나무가 많아 섶(땔나무) 신자를 써서 신도라 한다. 경북 경주에 살던 경주 이씨 이인경이 우연히 이곳에 들렀다가 경치가 좋고 수산자원이 풍부해 정착하기 좋은 곳이라 판단해 최 씨를 부인으로 맞아 정착하였다고 한다. 신도해수욕장의 고운 모래가 유명하고 각종 수산물이 풍부하여 섬 전체가 다도해해상국립공원에 속해 있다. 특산물로는 품질이 뛰어난 톳이 있다. 하의도, 대야도, 신도(이상 전남 신안군)는 서로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청용어촌체험마을

청용어촌체험마을

15.5 Km    19825     2023-07-27

전라남도 진도군 진도읍 청룡안길 130-12

오독오독 씹히는 간재미회에 인정까지 버무려 주는 사람들 간재미가 맛있는 고장이라면 단연 진도를 꼽는데, 그중에서도 간재미가 많이 나는 곳이 바로 청룡마을이다. 이 조그마한 포구는 간재미며 각종 생선을 낚아올리는 전형적인 어촌으로 간조시 노출되는 넓은 간석지에서 바지락 및 고둥 캐기와 진도만의 개매기 체험을 통해 각종 어류를 잡는 체험을 즐길 수 있다.

진도 남도진성

진도 남도진성

16.3 Km    26806     2024-05-29

전라남도 진도군 임회면 남동리

진도는 땅이 기름지고 농사가 번창해서 옥주라고도 부른다. ‘한 해 농사지어 삼 년을 먹는다’라는 말이 아직까지 내려올 정도로 물산과 인심이 넉넉한 고장이다. 진도는 예향이면서 워낙 외진 곳이기에 유배지로도 활용되었고, 군사적 요충지라서 군사 관련 유적들이 많이 남아있다. 남도진성은 백제 시대 매구리현의 중심지였던 곳으로 여겨지는데, 고려 원종 때 삼별초군이 진도로 남하한 몽골군과의 항쟁을 위한 근거지로 삼았던 성이며, 그 후 1438년 세종 20년에 또다시 성을 보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남도진성은 높이 4~6m, 폭은 2.5∼3m가량 되는 성으로 둘레가 610m이다. 둥그런 성벽과 동문, 서문, 남문이 거의 그대로 있으며, 서문 양옆에 밖으로 튀어나온 치가 남아있다. 남도진성 남문 앞으로 흘러가는 가느다란 개울 위에는 쌍운교와 단운교 두 개의 운교(무지개다리)가 놓여있다. 두 개 모두 편마암질의 판석을 겹쳐 세워 만든 것으로 규모는 작지만, 전국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특이한 양식이다.

서망항

서망항

16.5 Km    0     2024-04-24

전라남도 진도군 임회면 남동리

전남 진도군 서망항은 가을 꽃게잡이가 풍어를 이루는 전국 꽃게 주산지다. 진도에서도 남쪽 끝자락에 위치한 서망항은 진도읍에서 약 40분 정도 소요된다. 진도군 조도면 해역에 매일 40여 척이 출어해 1척에 200kg가량을 잡아 하루 위판량이 3t~5t에 달한다. 냉수대가 형성돼 플랑크톤 등 먹이가 풍부한 진도 조도면 해역은 갯바위 모래층으로 꽃게 서식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으며 또 연중 적조가 발생하지 않는 청정해역으로 다른 지역보다 꽃게의 상품성이 좋아 관광객들의 발길이 줄을 잇는 곳이다. 서망항에는 싱싱한 횟감과 수산물을 살 수 있는 수산물 시장과 맛집들도 있다.

상조도

상조도

16.6 Km    28488     2022-12-27

전라남도 진도군 조도면 조도대로 1298

1600년대 초 순창설씨 일가가 맹성리, 동거차도, 상조도 율목 등지에서 입도하였다. 같은 시기에 양주허시가 경기도에서 율목으로 이주했고, 1700년대 초 양주허씨 허정길이 의신면에서 입도하였다. 중엽에는 진주강씨가 조씨와 혼인하면서 정착하였다. 작은 섬들이 마치 새떼처럼 많이 흩어져 있다 하여 윗섬을 상조도라 하였으며, 백제시대에 제주도 왕래시 배가 정박하였다하여 정주도라고도 하였다. 상조도에는 율목, 맹성 선착장이 있다. 진도 주변에는 혈도, 가사혈도, 백야도, 상조도, 하조도, 관매도, 독거도 그리고 접도, 금호도가 있다. 상조도 도리산 전망대에 서면 조도의 섬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눌옥도

16.7 Km    21587     2023-08-14

전라남도 진도군 조도면 눌옥도길 2-1

1700년에 밀양 박씨 박종관의 5대조인 박존찬이 입도하여 마을을 형성하였고 그 후 김해 김씨, 경주 이씨, 인동 장씨가 입도하여 마을을 이루었다. 지형이 누룩처럼 생겼다 하여 누룩섬이라고 한다. 1789년 조선시대 실시한 인구조사 때 눌옥도로 기록되었다. 마을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부리는 마치 철새인 황새 부리 모양과 흡사하여 옛날부터 이 부리 때문에 마을이 크게 부흥했다가 줄어든다고 전하고 있다.

* 면적 : 0.6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