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Km 2024-10-02
서울특별시 종로구 필운대로5가길 13-4 (누하동)
0507-1342-2361
많은 차와 사람으로 붐비는 서울, 90년이 넘은 세월 동안 변하지 않는 한옥의 멋과 향을 간직한 ‘오롯이, 한옥’은 방 4개, 화장실 2개, 부엌 하나와 마당 전체를 사용하는 독채 한옥이다.
2.3Km 2024-09-12
서울특별시 중구 퇴계로 344
광희문은 태조 5년(1396) 도성 창건 때 동남쪽에 세운 소문이다. 광희문은 실질적인 도성의 남소문으로 이를 흔히 수구문으로 불렀다. 청계천이 흘러 나가는 곳에 세워진 수구가 거리상으로는 광희문보다는 동대문이 가깝지만, 남소문이 장충단공원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언덕에 따로 있었기 때문에 편의상 수구문이라 부르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수구문은 실제로는 시구문으로 이용되었으니, 서쪽의 서소문과 함께 도성 내의 장례행렬이 동쪽 방향으로 지날 때 통과하는 문이었다. 임진왜란으로 도성과 궁성이 파괴될 때 광희문도 파괴된 것으로 보인다. 숙종 때 기록을 보면 남소문과 광희문의 자리를 혼동하기도 하고, 성문 터과 군영의 위치 확인도 어려울 정도로 파괴된 도성을 수축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광희문은 도성 수축이 이루어진 이듬해인 숙종 37년(1711)에 중건에 착수하는데, 수구문을 다시 쌓고 아울러 문루도 조성하게 하였다. 수구문은 심하게 파괴되어 석축을 새로 개수하는데 시일이 많이 걸리므로 서대문 지역을 담당하는 아문에 목재를 넘겨주어 돈의문 문루를 만들게 하였던 것이다. 이때에 성문이 수축되고 그 이후 언제 문류가 중건되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런데 숙종 45년(1719)에 수구문은 옛 이름이 광희문이니, 해당 군문에서 액호를 써서 걸 것을 요청하자 대리청정하던 세자가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 영조 때에 도성의 문루가 없는 성문을 중건하게 되었는데 그 대상에 광희문은 포함되지 않았다. 그리고 1759년대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도성도에는 당시 문류 유무에 따라 성문을 그렸는데 수구문에는 문루가 표현되어 있다. 따라서 광희문은 숙종 때에 재건된 것으로 확인된다. 광희문은 일제가 전차궤도를 부설하면서 성곽을 철거할 때도 문과 문루는 그대로 남아 있었으나, 6.25 전쟁으로 문루가 파고 된 상태로 방치되었다. 그 후 1975년에 도로 중간에 위치하게 되어 원위치에서 남쪽으로 15m 옮기는 이전 복원공사가 시작되어 1975년 11월에 준공되었다. 광희문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을 보면 인조 2년(1624)에 이괄이 난을 일으켰다가 수구문을 통하여 도망갔고, 병자호란(1636)때에는 임금이 역시 이문을 통과하여 남한산성으로 옮겼다고 한다. 그리고 조선시대 일본 사신들은 옥수동 두모포나루로 한강을 건너 광희문을 통하여 인현동에 있던 지정숙소인 동평관으로 향하였다. 성문은 서울성곽의 다른 소문과 같이 장방형 무사석으로 높게 축조한 육축을 마련하고 육축 가운데 홍예를 앞뒤로 설치하여 통로를 만들고, 그 위에 문루를 조성하였다.
2.3Km 2024-08-28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덕궁길 164
중앙고등학교는 1908년 기호지방의 우국지사들에 의해 설립된 기호학교가 1910년 9월 흥사단이 설립한 융희학교를 합병하여 설립된 학교이다. 1910년 11월 모두 통합하여 중앙학교로 학교 이름을 개칭하였다. 1915년 김성수가 인수하였고, 1917년에는 계산 언덕에 교사를 신축하고 이전하였다. 본관, 서관, 동관 등의 건물을 12월에 준공하였으며 당시의 교사는 2층 벽돌집이었다. 1934년 본관이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1935년 6월 우리나라 근대 건축가이자 고려대학교 본관과 도서관, 조선일보 사옥을 설계한 박동진(1899~1980)의 설계로 다시 착공하여 1937년 9월에 준공하였다. 중앙고등학교 본관, 서관, 동관은 각각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본관은 학교 정문에서 바라볼 때 정면에 세워졌으며, 석조 콘크리트 철근 2층의 근대식 건물이다. 좌우가 대칭되는 H자형 평면의 중앙에는 중세 시대 고딕 성관풍의 4층 탑을 두고, 그 좌우로 1층에는 교무실, 2층에는 교실을 두었다. 서관은 1921년 10월에 2층 붉은 벽돌집으로 준공되었으며, 설계자는 확실치 않다. 1934년 화재로 없어진 구 본관 건물(지금의 동상이 있는 곳)을 중심으로 왼쪽에 동관이 있고, 오른쪽에 바로 서관이 자리 잡고 있다. 회백색의 화강암 돌과 붉은 벽돌로 엇물려 지은 이층집이다. 설계자는 일본인 중촌여자평이다. 평면은 T자형이며, 박공면이 돌출해 있다. 이곳에는 모두 교실을 배치하였다. 또한, 3·1운동 이후 조선 소년군 창설, 6·10만세운동, 광주학생운동을 시작한 곳이기도 하다. 동관은 1923년 10월 준공된 2층의 붉은 벽돌집으로 1934년 화재로 소실된 구 본관 왼쪽에 지어져 건너편의 서관과 마주 보고 있다. 서관과 마찬가지로 설계자와 시공자는 기록이 없어 확실하지 않다. 동관의 건물구조와 특징은 서관과 비슷하다. 붉은 벽돌집 슬레이트 이름의 고딕식이다. 평면은 T자형이며, 박공면이 돌출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