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M 2024-09-20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순흥로39번길 21
054-634-4614
영주 부석사 근처 마을인 순흥에는 1970년대부터 전통 묵밥 한 가지만 만들어온 순흥전통묵집이 있다. 옛날부터 내려온 전통적인 방법으로 메밀묵을 제조하며, 전통묵밥 단일 메뉴만을 판매하는 곳이다. 전통묵밥과 함께 제공되는 갖가지 반찬과 김치 또한 정갈하고 깔끔한 맛으로 손님들에게 인기가 많다.
186.0M 2023-10-04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순흥로 50
054-633-2052
순흥면 소재지에서 85년도부터 영업한 흥주식당(순흥의 옛 지명)은 오징어불고기와 오삼불고기로 유명한 업소이다. 이 집의 오징어불고기 맛은 특별하다. 양념이 매워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마지막에 밥까지 비벼 먹을 정도로 감칠맛이 난다. 모든 음식이 그렇지만 이 집도 신선한 오징어와 배추를 사용하고 있으며 큼지막하게 썬 배추는 적당히 익은 후 찢어서 먹는 맛이 또 별미이다. 집에서 볶아 먹을 수 있도록 포장 판매도 한다.
663.3M 2023-01-17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회헌로1010번길 23-49
석교리 석불상은 승림사지로 알려진 야산의 계곡에 있다. 순흥면 사무소에 있는 유형문화재 머리를 잃은 석불입상과 거의 흡사한 양식으로 파악되는데 바튼목에 가슴을 완전히 가린 통견의, 한 손을 몸에 밀착시킨 손자세, 평행계단식의 옷주름 표현, 하체에 보이는 동심타원형의 주름까지 동일한 형상이다. 불두는 목부위가 절단된 것 보수하였다. 손상이 심하나 비교적 잘 남아 소발에 크고 넓은 육계가 올려졌고 양 귀는 하단이 파손되었으나 크게 길게 내렸던 듯 어깨 위로 귀가 닿았던 흔적이 남아있다. 상호는 이목구비가 적당하게 배치되었고 코 부근을 깊게 새겨 살이 붙은 얼굴이다. 목에는 삼도가 남아있고 통견의 옷깃이 넓은 띠처럼 어깨와 가슴 위쪽으로 돌려졌다. 옷주름은 왼팔 위에서 시작해서 우측 하단으로 방사선식으로 흐르고 하체에서는 두 개 동심타원형이 새겨졌다. 옷주름은 거의 평행선을 이루는 계단식주름이다. 왼손은 옷자락을 잡은 듯 보이고 오른손은 팔꿈치부근에서 파손되었다. 두터운 대의 표현에 비해 신체 굴곡의 표현은 좋은 편이다. 조성시기는 8세기 후반으로 순흥면사무소에 있는 석불입상과 거의 비슷한 시기로, 동일 조각가군에 의한 것으로 추정된다.(현고 200cm)
830.4M 2024-10-24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소백로 2547-16
1985년 1월 문화재관리국과 대구대학교가 함께 발굴 조사한 이 벽화 고분은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학술적, 문화재적으로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이 고분의 축조연대는 고분의 현실(玄室) 남쪽 벽에 쓰인 기미중묘상인명(己未中墓像人名)이란 글씨를 통하여 대략 539년쯤으로 추정되고 있다. 내부구조는 연도가 마련된 석실분(石室墳)으로서 연도를 통해 들어가면 시신을 모신 현실이 있고, 이 현실의 동쪽으로 관을 올려놓았던 관대(棺臺)가 비교적 높게 마련되어 있으며, 아울러 규모가 작은 보조관대도 현실의 서북 모서리에 마련되어 있었다. 현실의 크기는 동서 약 3.5m, 남북 약 2m로 네 벽은 위로 갈수록 약간씩 각을 줄이고 천장은 두 장의 판판하고 큰 돌을 올려 완성하였다. 벽화는 천장을 제외한 내부의 모든 벽면과 관대의 측면까지 채색화(彩色畵)를 그렸고, 특히, 연도의 좌우 벽에 힘이 센 장사상(壯士像)을 그렸다. 특히, 연도 서쪽벽의 뱀을 손에 감고 있는 장사상은 이 무덤을 지켜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이 고분은 벽화나 구조로 보아 고구려의 영향을 받아 축조된 고대신라의 고분벽화로 추정되며, 이 고분에 있는 벽화를 통해서 우리나라 삼국시대 회화는 물론 당시의 종교관, 내세관, 그리고 고구려와의 문화교섭 등을 이해하는 귀중한 자료임을 알 수 있다. 특히, 5세기까지 고구려의 영향력이 정치적, 문화적으로 이 지역에 침투했음을 잘 알려주는 유적으로, 현재 학자들의 새로운 연구대상이 되고 있다.
830.4M 2023-08-08
풍기에서 부석으로 이어지는 길에는 늘 백두대간이 함께 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과 경북의 고택을 한데 모아놓은 선비촌, 무량수전 등 값진 문화유산과 함께 석양이 아름다운 천년고찰 부석사까지 만난다. 성혈사의 아름다운 창살이 있는 나한전, 마구령과 고치령을 넘나들며 즐기는 캠핑까지 백두대간 소백산 자락을 즐길 수 있는 여정이다.
1.2Km 2024-10-31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태장리
비봉산 서남 남사면에 있는 신라의 벽화무덤으로, 1971년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에서 조사하였다. 흙을 쌓아 올린 원형 봉토무덤으로, 지름은 16m이며, 파손이 심하여 높이는 확인할 수 없다. 봉토 아래쪽에는 자연석을 이용하여 둘레돌을 돌렸다. 내부는 널방(현실)과 널길(연도)이 있는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이다. 현실의 4곳의 벽과 천장 표면에는 석회를 바르고 벽화를 그렸으며, 바닥에는 널을 올려놓는 넓은 널받침을 설치하였다. 서쪽 벽 위에는 도굴로 인해 흙이 밑에 쌓여 있었고, 유물은 남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널방은 돌로 문짝을 세워 닫았으며, 널길 입구에는 막돌을 쌓아 막았다. 그림은 무덤 전반에 걸쳐 그려졌으나 자연적인 습기 등으로 파괴되고 널길천장과 문짝에만 벽화가 남아있는데 모두 석회를 바르고 그 위에 그림을 그렸다. 천장에는 대형 연꽃무늬 1개가 그려져 있는데 붉은색 한 가지로만 연꽃을 그린 것이 특색이다. 돌로 만든 문짝의 바깥쪽에는 인물상으로 보이는 그림이 전면에 그려 있으나 거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으며, 문짝의 안쪽에는 ‘을묘년어숙지술간’이란 글을 새겼다. 을묘년은 연꽃무늬로 보아 법흥왕 불교 공인 이후인 6세기말의 진평왕 17년(595)년으로 추정되며, 어숙은 사람 이름으로 고구려계이다. 술간은 신라의 관직명으로 6세기경 이 지방이 고구려와 신라의 경계지역이라는 독특한 상황에서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순흥 벽화무덤과 함께 신라 영역에서 발견된 벽화무덤이라는 점과 이름이 있는 신라 유일의 무덤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자료가 된다. 특히 연꽃무늬와 어숙이라는 사람 이름이 고구려계로 추측되어, 이 지역이 고구려와 신라의 통로였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1.4Km 2024-10-22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소백로 2740
백두대간의 정기를 머금은 소백산자락 영귀봉(靈龜峰)아래 위치한 소수서원(紹修書院)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주세붕(周世鵬)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창건한 데서 비롯되었다. 평소 고려말 유현(儒賢)인 안향(安珦)을 흠모하던 주세붕이 풍기 군수로 부임한 이듬해인 1542년(중종 37), 안향선생의 고향에 사묘를 세워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고 다음 해 1543년에는 학사를 건립하여 사원(祠院)의 체제를 갖춘 것이 백운동서원의 시초이다.
1.4Km 2023-08-09
영주의 우리나라 최초 사액서원(임금이 현판 하사)인 소수서원과 순흥향교를 조용히 걸어보자. 체험활동처럼 떠들썩한 맛은 없지만 잔잔한 자연에 어우러진 선비의 정신을 온전히 느낄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한 여름에 방문하면 죽계구곡의 시원한 물소리에 더위를 잊는다.
1.5Km 2024-10-15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소백로 2780
소수 박물관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인 영주 소수서원에서 보관하던 유물을 전시하며 민족정신의 뿌리를 찾아가기 위해 설립된 유교 박물관이다. 2004년 개관하였으며 지하 1층, 지상 2층의 건물로 5개의 전시실과 수장고, 시청각실, 야외전시실로 이루어져 있다. 기획 전시실은 기증받은 2만여 점의 유물을 연차적으로 순환 전시하고 있으며, 제1전시실은 선사시대를 비롯한 삼국시대, 조선시대의 문화유적을 전시하고 있다. 제2전시실은 [유교의 전래]라는 테마로 이황의 성학십도와 사서삼경, 학맥도를 전시하며, 제3전시실은 조선시대 시학 기관인 서원과 지방 교육기관인 향교에 대한 것을 전시하고 있다. 제4전시실에서는 우리나라 최초 서원인 소수서원 창건 이야기와 소수서원에 배향된 인물 등 소수서원과 관련된 유물들이 전시되고 있다. 소수 박물관 통합 관람권으로 영주 선비촌, 소수서원, 소수 박물관을 모두 관람할 수 있다.
1.5Km 2024-10-24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소백로2767번길 28
영주 금성대군 신단은 사적 제49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조선 세조 때 단종임금의 복위(復位)를 도모하다가 무참히 화를 입은 금성대군(錦城大君:이름 瑜, 세종임금의 여섯째 아들, 단종의 숙부, 수양대군의 넷째동생)과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 및 그 일에 연루되어 순절한 의사들을 제사 드리는 곳이다. 조선 세조 원년(1455) 단종임금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은 수양대군 일파는 금성대군에게 모반의 누명을 씌워 삭령(朔寧)으로 유배시켰다가 다시 광주(廣州)로 이배(移配)시켰었다. 이듬 해 성삼문 (成三問), 박팽년(朴彭年) 등 사육신이 상왕 복위운동에 실패하여 참혹하게 희생되자 그 일에 연루되었다 하여, 금성 대군은 다시 이곳 순흥으로 유배,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금성 대군은 당시 순흥부사 이보흠과 의기가 통하여 단종복위를 위한 격문을 짓게 하여 은밀히 순흥고을로 모여들게 하였다.
군비를 모으고, 무기를 장만하고, 군사를 조련하여 영월에 유배되어 있던 단종임금 복위를 꾀하는 거사가 무르익어가던 세조 3년(1457) 가을 어느날 밀의를 엿들은 순흥부의 한 관노의 밀고에 의하여, 관군의 습격을 받은 순흥 고을은 온통 불더미에 피바다를 이루는 도륙을 당하면서 폐부 (廢府)되고 말았다. 그로부터 200여년이 지난 숙종 9년(1683)에 순흥은 명예가 회복되고, 이어 숙종45년(1719) 고을사람 이기륭(李基隆)이 부사 이명희(李命熙)에게 알려, 단소(壇所)를 설치하게 된 것이다. 금성대군 신단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영조 18년(1742) 경상감사 심성희(沈聖熙)의 소청에 의하였으며, 단소를 정비하고 중앙에 금성대군 위(位), 오른쪽 편에 부사 이보흠 위(位), 왼편에 무명 의사 위(位)를 모시고 순의비(殉義碑)를 세웠다.
* 금성대군 신단(사적 제491호)
이 곳은 조선 세조2년 (1456)에 성삼문 등 사육신의 단종복위운동에 연루되어 순흥에 위리안치되어 있던 세종 여섯째아들 금성대군이 순흥부 이보흠 및 향중 유림과 더불어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 실패하여 순절하자 그들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마련된 제단이다.단종복위운동이 실패되자 순흥부는 폐부되었다. 그 후 숙종 9년(1683) 순흥부가 복원되고 순절 의사들이 신원 되자 동와 45년(1719)에 부사 이명희(이명희)가 단소를 설치하였으며, 영조18년(1742) 경상감사 심성희가 단소를 정비하고 위를 모시고 순의비를 세워 매년 봄·가을로 향사를 지내오고 있다.